중세 요새도시와 현대미술의 만남
카르카손 Carcassonne 은 전형적인 요새 도시입니다. 오드 Aude 강가의 가파른 기슭에 자리 잡은 카르카손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작은 탑과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거로 시간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 대륙 사이라는 전략적 위치에 자리한 까닭에 BC 2세기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요새를 건설했답니다. 약 2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카르카손은 초기엔 골 족의 정착지였고 이후 로마인, 비시가트인, 사라센인, 십자군에 의해 각기 다른 시대에 점령되어 왔습니다. 특히 중세의 전투에서 중요한 요새도시였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수많은 전쟁 속에 묻혀버렸을 것입니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분쟁을 멈추고 국경을 새로 정한 피레네 조약 (1659년) 이후 이 요새 성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고 완전 폐허로 남게 됩니다.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현재의 모습은 자료를 바탕으로 19세기에 복원한 것입니다. 카르카손을 사랑한 건축가 비올레 드 뒤크(1814~1879)의 열정이 낳은 것입니다.
카르카손이라는 도시 이름과 관련해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카르카손의 어원은 레이디 카르카스라는 이름의 성주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카르카스는 샤를마뉴에 대항해 전사한 무슬림 왕자 발라크의 아내로 남편이 죽은 후 프랑크 군에 맞서 도시를 방어해야 했답니다. 레이디 카르카스는 머리가 비상해서 적은 병력으로 대군으로부터 성을 지키고 적을 격퇴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 허수아비 병사를 만들어 각 탑에 넣어두어 적으로 하여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포위는 5년간 지속되었고 6년이 시작될 무렵에는 식량과 물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을 때 레이디 카르카스는 남은 모든 식량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이 도시는 사라센이고, 이슬람교 인구의 일부는 돼지고기를 소비하지 않지요. 마을 사람들은 돼지 한 마리와 밀 한 자루를 가져왔는데 레이디 카르카스는 돼지에게 밀 한 자루를 먹인 다음 성벽 바깥 기슭에 있는 가장 높은 탑에서 돼지를 밀어버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샤를마뉴와 그의 부하들은 포위된 채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밀을 먹인 돼지를 낭비할 정도로 군인과 식량으로 넘쳐나고 있다고 믿고 포위를 풀기로 합니다. 샤를마뉴의 군대가 도시 앞 평야를 지나 떠나는 것을 보고, 레이디 카르카스는 적을 물리친 것을 기뻐하며 도시의 모든 종을 울리도록 했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샤를마뉴의 부하 중 한 명이 외쳤습니다.
"카르카스가 종을 울리고 있다!"
이를 프랑스어로 하면 "카르카스 손느!"이고 줄여서 카르카손이 된 것이랍니다. 카르카손 고성의 나르본 문에는 전설적인 인물 레이디 카르카스의 거대한 조각이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랑그독 루시용 지방은 중세 기독교 종파인 카타리파가 성장한 지역입니다. 12세기 말~13세기 레몽 로제 트랑카벨은 카르카손에 성과 성당을 짓고 카타리파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카타리는 그리스어로 순수를 나타내는 카타로스 Katharos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기성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며 물질세계를 악으로 간주하고 진정으로 순수해 지기 위해 세속적인 생활을 버리고 비폭력과 채식, 금욕생활을 했던 기독교 종파입니다. 랑그독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급속히 확대되자 로마 기독교 교단에서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1209년 십자군을 보내 카타리파를 없애도록 합니다. 저항하던 카타리파 사람들이 종교재판을 받았고 수만 명이 희생당했답니다. 카르카손도 십자군에 포위되어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생나제르 성당에 남아있습니다.
카르카손은 나폴레옹 치하에서 무장해제되었고, 카르카손의 요새 도시는 버려졌습니다. 200년이 지나 너무나 황폐해져 프랑스 정부는 1849년 칙령으로 이를 철거하기로 했지만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지요. 특히 카르카손 시장인 장 피에르 크로 메레비유와 고대 유적 조사관인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이 요새를 역사적 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한 캠페인을 주도했습니다. 결국 정부를 설득해 카르카손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생 나제르 대성당 복원 작업을 하고 있던 건축가 외젠 비올레 르 뒤크가 이곳을 복원 및 보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1853년 서부와 남서벽에서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어 나르본 성문의 탑과 시테의 주요 출입구 복원 공사가 이어졌습니다. 요새는 여기저기 통합되었지만, 주요 관심은 탑과 성벽의 지붕을 복구하는 데 쏠려 있었는데, 비올레 르 뒤크는 남쪽 지방의 전형적인 스타일인 테라코타 타일 대신 북부 지방에서 사용되는 슬레이트 지붕을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때문에 아직도 카르카손의 복원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복원 업적은 천재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비올레 르 뒤크는 1879년 죽음을 앞두고 그의 제자인 폴 보즈윌발트와 그의 뒤를 이어 건축가 노데가 카르카손의 복원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많은 메모와 그림들을 남겨 작업을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이 성채는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성문으로 들어가면 작은 도시가 나옵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성과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 상점, 시장, 식당 등. 대부분 중세 성채도시는 자족도시의 기능을 하도록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갈로-로만 시대에 설립된 성채는 52개의 탑과 이중으로 들어선 3㎞ 길이의 성벽으로 유명합니다. 그 성벽에 야광 페인트로 둥근 원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나르본 퐁푸르아 수도원 편에서 잠시 언급했는데 방문객들이 많은 여름 시즌 6월부터 9월까지 남부 옥시타니 지방에서 역사적 건물이나 문화유적 12곳에 유명한 현대미술 작가들을 초대해 현대 미술작품을 설치하는 IN SITU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카르카손에서도 있었던 겁니다. 워낙 눈에 띄어서 멀리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성채를 더욱 멋지게 만들었습니다. 특히나 카르카손 성채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정 2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탈리아 작가 펠리체 바리니의 작품 ' Cercles concentriques excentriques '입니다. 동심원, 편심원 정도로 뜻을 이해하면 되겠네요.
오드 Aude 문을 중심으로 성벽과 탑에 동심원을 그려 넣은 작품입니다. 굵기는 외곡으로 갈수록 굵어집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서 익숙해진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답니다. 그곳에 그 장소를 이용해 설치를 하는 장소 특정적 작품입니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봤을 때 참 신기하고 신선했습니다. 이 역시 여행의 즐거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