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노란 카페 해바라기
나는 항상 어디론가,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자 같아.
떠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넋두리 같지요. 빈센트 반 고흐(1853.3.30~1890.7.29)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의 내용입니다. 1888년 8월 6일 남프랑스 아를 Arles에서 썼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으로 하고나서 고흐는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에 와서(1886년 2월 28일 파리 도착) 파리의 열정에 큰 감동을 받지요. 그러나 팍팍한 도시의 삶에 압박감을 받던 중 반 고흐는 좀 더 예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1888년 2월 19일 반 고흐는 강렬한 태양과 찬란한 빛이 있는 프로방스로 떠납니다. 반 고흐가 찾아가 감동한 것은 빛나는 노란색이었습니다. 해바라기 같은 노란색입니다. 아를에 도착한 반 고흐는 성벽 바로 안쪽 카발르리가 30번지에 자리한 호텔에 방 하나를 빌리고 옥상을 아틀리에 삼아 그림을 그립니다. 두 달 뒤 비싼 숙박료 때문에 그 호텔을 떠나 단독으로 쓸 셋 집을 찾던 중 가격도 훨씬 싸고 공간이 꽤나 널찍한 집을 발견합니다. 라마르틴 광장 2번지 의 '노란 집'입니다.
" 밖은 노란색이고 안은 흰색이며 햇빛이 환히 들어오는 곳 "이라고 흥분된 어조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썼을 정도로 대만족이었습니다. 노란 집은 기차역과 사창가 사이에 위치해 그다지 살기 좋은 지역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이 집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손볼 곳이 무척 많았는데도 말입니다. 반 고흐는 일단 그 집을 다시 페인트를 칠하기로 하고 수리하는 동안 바로 옆 카페 드라가르에 작은 방 하나를 구해 생활합니다. 반 고흐가 '작은 노란 집'에서 처음 잠을 잔 것은 9월 중순이었습니다. 새로 꾸민 침실을 10월 중순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나무 침대와 세면대, 그리고 의자 2개가 고작인 소박한 방은 그에게 큰 행복과 기대감을 주었겠지요.
노란 집은 1층에 거실과 부엌이 있고 2층에는 침실이 두 개 있었답니다. 하나는 자신이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손님용이었는데 반 고흐는 노란 집에서 동료 화가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예술적 공동체를 이루고 창작이 영감을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노란 집에서 함께 작업할 동료 화가로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이 파리에서 알게 된 폴 고갱이었지요. 부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 아를로 오라고 권합니다. 고갱을 기다리는 동안 노란 집을 장식할 요량으로 그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들을 그립니다. (고흐는 아를에서 총 7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아를에 도착합니다. 이후 그들은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불같은 성격의 두 사람은 치열하게 논쟁도 벌입니다. 고갱은 상상력을 매우 중시하지만 고흐는 눈앞에 풍경이나 인물, 사물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다툼은 결국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고 고흐의 예술적 공동체에 대한 꿈은 극단적인 자해로 끝나고 맙니다. 당시의 자해 사건은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의 지방소식 난에 짧게 실렸습니다.
‘ 벵상 반 고그 (프랑스식 발음입니다)라는 네덜란드인 화가가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르는 자해사건을 벌였다. 그는 (자른) 자신의 신체를 인근의 여인 집을 찾아가 건네며 “언젠가 쓰일 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반 고흐는 1989년 4월 말 노란 집을 정리하고 5월 8일부터 생레미 외곽의 정신병원에서 지냅니다.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으면서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지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이 소장한 '별이 빛나는 밤에'는 1889년 생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 동트기 전 밤하늘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기억과 상상을 결합해 병실 밖으로 보이는 밤 풍경을 그렸습니다. 요양원에 가기 전에 그린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1888~1889)과 소재는 비슷하지만 화법은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불꽃처럼 솟아오르는 듯한 사이프러스, 태양처럼 노랗고 밝게 빛나는 별, 휘몰아치는 듯한 하늘의 구름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는 마을 풍경. 아무 일없이 조용히 돌아가는 세상과 달리 격정적인 내면과 절망적인 상황에 괴로워하는 이방인, 모든 것에서 훌훌 벗어나 별에 다가가고 싶은 고흐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 그림을 볼 때 늘 가슴이 아픕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픈 고흐의 광기와 세상의 냉대가 그림 속에서나마 만나 서로 화해를 하는 듯합니다.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있다.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소리가 들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 별은 심장처럼 파닥거리며 계속 빛나고,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를은 남프랑스를 여행할 때 꼭 들러봐야 하는 도시로 꼽힙니다. 바로 위대한 화가 반 고흐의 흔적을 밟아 보기 위해서지요. 강둑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별 빛이 아니어도 환상적입니다. 늑대들의 시간이라고 하던가요? 어스름한 저녁에 가로등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하면 괜스레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아를은 이미 몇 차례 들렀던 곳이라 이번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 머물렀습니다. 고흐의 흔적 외에도 원형극장 등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유명한 사진학교도 있습니다.
고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갑니다. 1890년 5월 17일 파리로 돌아옵니다. 프로방스로 떠난 지 2년 만이었습니다. 동생 테오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고, 고흐 자신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번잡한 도시를 떠나 다시 시골로 가기를 원했고 파리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오베르 쉬르 와즈로 갑니다. 조용한 농촌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매일 한 점씩 그림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1890년 7월 27일 자신의 복부에 총을 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이틀 뒤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납니다. 여러 가지 직업을 시도하다 뒤늦게 그림을 시작하고 불과 10년간 화가로 활동하면서 고흐는 작품 900점과 습작 1100점 등 2000점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짧은 생을 알기라도 했듯이 말입니다.
오베르 쉬르 와즈는 프랑스에 있을 때 여러 차례 갔습니다. 성당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도 그대로입니다. 마을 공동묘지에는 반 고흐가 누워있습니다. 6개월 뒤 세상을 떠난 동생 테오가 그 옆을 지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