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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Jul 13. 2020

[남프랑스 기행 #15]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폴 세잔은 왜 그렇게 그 산을 그렸을까?  

산에 가면 행복한 이유가 뭘까요? 자연 속에서 안식을 찾고 힐링할 수 있다는 것은 산을 찾아본 사람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숨은 이유를 알았는데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입니다. 산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아무런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폴 세잔은 파리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엑상프로방스의 대자연을 통해 자연의 깊이를 재현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긴 세월 변치 않고 위용을 자랑하는 생트 빅투아르산이었습니다.  세잔은 자신은 생트빅투아르 산을 담은 유화 44점, 수채화 43점을 남겼습니다.

세잔은 어린 시절 에밀 졸라와 헤매던 자연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늘 엑상프로방스의 자연 풍광은 곧 생트 빅투아르였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고향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그렸지만 1891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집중적으로 되풀이해 그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을 화폭에 옮기는 풍경화를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 속에서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의 깊이를 어떻게 하면 단순화시켜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자연의 본질을 단순화시키며 그 진수를  전달하려 하는 것은 세잔이 평생을 붙잡고 있던 화두였습니다. 그래서 세잔은 일생동안 사과의 미묘하고 다양한 모양과 색채에 파고들었고 생트 빅투아르산을 그리며 자연의 순수한 기본을 찾아내려 했던 것입니다.

사실주의 화가들이 했던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이 예술가의 붓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시각성의 탐구를 통해 완성한 개성적인 표현과 완벽한 구도, 순수한 색면 추상적인 그의 회화는  20세기 큐비즘과 추상미술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잔을 일컬어 '현대회화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폴 세잔의 고향 엑상 프로방스는 프로방스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년 전에 파리 특파원 시절 마지막 해에 엑상프로방스로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TGV 역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걸개그림에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 그림이 있고 저 너머로 아스라이 실제 생트빅투아르 산이 보이던 풍경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일정 관계로 긴 시간 머물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어서 이번 여행에서는 좀 여유를 두고 머물기로 작정했던 바입니다.

곧바로 도시로 진입하는 것보다는 좀 에둘러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저 멀리 세잔을 사로잡았던 생트 빅투아르 산이 바라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습니다. 지인 소개로 근처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머물려 했는데 그곳의 숙소가 마땅치 않게 되어서 소개 해준 샹브르 도트 (우리말로 민박 ) 리스트 중에서 고른 집입니다.

‘프로방스 스타일 안느 도미니크의 집, 멀리 생트빅투아르 산이 보이는 곳'이라고 적어 놓았고, 사진으로 보니 깔끔하고 괜찮아 보였습니다. 원래 이틀 밤을 예약했다가 여정상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하룻밤만 이용해야 할 것 같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문제 될 것 없다’, 현장에서 지불해도 되는지 물어도 ‘문제 될 것 없다’고 쿨하게 답신을 보내주어 마음이 놓였지요. 여행자의 입장을  잘 이해해 주는 배려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예정보다 너무 시간이 지체된 데다 주소를 보고 아무리 찾아도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름 모르는 도시를 밤길에 자동차로 몇 바퀴 뱅뱅 돌다가 마을 성당 앞에 나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젊은 이들에게 물어보니 완전 반대편에 와있었습니다. 할 수없이 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를 찾으러 나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밤중에 우리를 위해 차를 몰고 나와 준 민박집주인 아주머니 안느 도미니크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미소로 길 잃은 우리를 맞아 주어 미안하고 불안한 마음이 좀 가라앉았습니다.

깔끔하고 조용한 별채에서 편하게 잠을 자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남프랑스에서 만날 수 있는 맑고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싱그럽습니다. 별채에서 올라오는 나무계단에서 고양이 로키가 한가로이 늦은 아침의 평화를 즐기고 있네요. 안느 도미니크는 정원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타운하우스라 정원이 크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가꿔 놓았습니다. 풀장도 있고 건강한 금붕어들이 살고 있는 작은 연못도 있는 집입니다.  

민박집주인 안느 도미니크는 원래 파리 출신 호텔에서 일하다 은퇴 후 친척들이 많은 이곳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직업 경험을 살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집의 별채를 수리해 민박을 하기 시작했는데 즐겁다고 했습니다. 일전에 한국 가족이 한번 와서 머문 적이 있다면서 그때 일화를 들려주는데 역시 한국인은 대단합니다. 수개월간 유럽 일주를 하는데 외국어를 하는 사람은 그 가족 중 7살 난 딸이 유일하게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다네요. 그 가족이 부채를 선물했는데 여름이면 즐겨 사용했는데 찾을 수 없던 차에 이번에 선물로 꽃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선물했더니  무척 기뻐했습니다.

안느 도미티크는 지난봄 유방암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간호사가 방문해 건강 체크를 해 주고 딸도 자주 놀러 오고, 이렇게 민박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집안 관리하면서 보내니 크게 힘들지 않다고 합니다. 집 구경도 시켜줬습니다. 약간 언덕진 곳에 조성된 타운하우스인데 부엌에서 진짜 생트 빅투아르 산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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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1839~1906)은 엑상프로방스의 성공한 은행가이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이민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지역 유지들 사에에서 약간의 무시를 당하는 처지였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아들이 법학을 공부해 가문을 빛내주길 바랬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엑스에 있는 법과대학에 입학하지만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미술학교에서 데생 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르봉 중학교 동창인 에밀 졸라는 파리에 올라간 뒤 세잔에게 파리에 와서 화가가 되라고 부추긴다. 1861년 세잔은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파리에 올라가 아카데미 쉬스에 입학한다. 카미유 피사로가 세잔의 재능을 발견한다.  하지만 세잔은 파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엑스로 돌아가 아버지의 은행에서 잠시 일하다 엑스의 미술학교에 등록한다. 엑스와 파리를 오가며 그림을 그리던 세잔은 1863년부터 매해 살롱전에 작품을 내지만 계속 낙선했다. 상심한 세잔은 엑스와 파리, 레스타크 등에 체류하며 그림에 열중했다. 들라크루아의 화려한 색채와 쿠르베의 엄격한 사실주의에 심취한다. 마리 오르탕스 피케와의 사이에 아들 폴이 태어난다.  보불전쟁을 피해있던 세잔은 전쟁이 끝난 뒤  파리 외곽에 자리 잡고 피사로와 함께 작업한다. 고갱과 고흐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상주의 대열에 합류하라고 했던 피사로는 세잔에게도 훌륭한 스승이었다.  피사로는 세잔에게 자연과 접촉하며 느낀 감각을 표현하라면서 인상주의 기법을 전수한다. 1874년 첫 인상주의 작품전이 열린다. 드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이 출품했고  세잔도 세 점을 출품했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환멸을 느낀 세잔은 두 번째 인상주의 전시는 건너뛴다. 세 번째에 열일곱 점의 작품을 내지만 더 심한 비평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비난에 충격을 받은 세잔은 파리 북쪽 퐁투아즈에 머물며 피사로와 함께 작업을 이어간다. 파리의 일부 애호가 사이에 세잔을 인정하는 그룹이 생기기 시작한다.

1891년부터 세잔은 아내, 아들과 함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한다. 이후 파리에 가지 않고 은둔자처럼 엑스에 머물며 작업에만 열중했다. 파리의 화가들과 화상들 사이에서 세잔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당시 화구상인 탕기 씨의 가게가 세잔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이 가게를 드나들던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세잔의 그림에서 번뜩이는 천재성을 발견한다. 볼라르는 1895년 11월 12일 세잔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대중은 여전히 그를 외면했지만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모네 등 화가들은 찬사를 보냈다. 화상 볼라르는 작업실에 있는 세잔의 작품 전부를 사들였다. 세잔은 1901년 로브가에 작업실을 지었다. 빈과 베를린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세잔을 추종하는 젊은 화가들이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다.  

1906년 10월 5일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았다.  세탁물 마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지만 다음날 다시 그림을 그리러 산을 올랐다가 다시 쓰러졌다. 폐렴이 악화되어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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