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미술관, 이이남 개인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다' (~8.31)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달리 말하면 '정서적 일탈'이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라는 주제로 사비나미술관(서울 은평구 진관로)에서 열리고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의 개인전을 둘러보는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후 재앙의 징후인 무더위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동안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최첨단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미디어 아트와 접목을 시도해 왔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생명과학과 예술의 접목을 시도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연구소와의 협력으로 작가의 DNA 정보를 추출해 본인의 DNA 염기서열 정보(A, G, C, T)를 고전 회화와 결합한 다양한 영상 설치 작품 21점을 선보이고 있다. 신기술과 고전회화, 작가의 DNA 데이터를 접목한 작품이라는 발상부터 신선하다. 이번 전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작가의 의도와 배경에 대한 이해부터 해야 한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는 실재와 허구가 공존하는 초연결 시대에 팬데믹을 겪으며 작가 자신을 돌아보고 본질을 찾아가고자 하는 자아탐구에서 비롯된 주제이다. 작가는 지난 5월 전시 때문에 중국 허난성에 가야 했다. (작가는 허난성 밀밭 사이에 만들어진 테마파크 파사드에 가로 325m, 세로 16m 규모의 대규모 미디어 파사트 작업을 선보였다. ) 오고 가면서 도합 12주를 자가 격리로 보냈다. 거의 100일간 격리 생활을 하면서 저절로 자신의 정체성과 예술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맹렬하게 묻던 작가는 자신의 DNA부터 알아보자는 생각을 했고, 이번 전시로 발전했다.
작가는 " 본다는 것의 의미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 그리고 수많은 이미지, 보이는 것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일상과 주변에서 잠시 벗어나 나를 온전히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작가는 중국 북송의 사공도(837-918)가 지은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전시의 주제로 삼아 전시장 곳곳에 반사체를 이용한 새로운 공간 연출을 시도했다. 과거와 현재, 실재와 가상이 엇갈리는 시공간 속에서 작가의 DNA 데이터로 연결된 미래까지 넘본다.
" 우리는 평생 동안 '나'라는 신체 속에 갇혀 살고 있지만 자신을 마주 할 수 없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주변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얻어지는 간접적 정보일 뿐 직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불완전한 성찰 속에서 사공도의 이십사시품 중 '형상 밖으로 훌쩍 벗어나 존재의 중심에 손을 쥔다'는 표현은 온전한 나를 보고 싶은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사공도의 이십사시품은 중국은 물론 조선 후기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작품이다. 이이남 작가는 이십사시품을 그의 DNA 데이터로 재현했다. 작가는 "역사와 생명의 흐름 속에서 '나'라는 자아가 존재하기까지의 연결성을 역추적하고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뿌리와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며 앞으로 우리의 공동체와 인류는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상상하고자 한다." 고 말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작가에게 남도의 풍경과 전통 회화(남종화)는 지금까지의 작품을 이어오게 한 근간이 되었다. 이번 전시는 이와 같은 관계를 되짚으며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을 '산수'로 표현한 동양의 정신을 추구했다.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작품으로 성찰을 시도하면서 동양 회화의 핵심적인 개념인 ‘시화 일률(詩畵一律)’ 사상을 매개로 설치 작품들을 풀어나갔다. ‘시화 일률'은 ‘시와 그림은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중국 북송대의 시인인 소식(蘇軾, 1037~1101)은 중국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왕유(王維, 699-759)의 시에 대해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라고 그 개념을 표현했다. 곳곳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시화 일률에서 시와 그림의 경계가 없듯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람객을 작품 속에 끌어들이며 작품과 관객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2층으로 올라가면서 시원한 폭포 소리를 울리며 물이 떨어지는 작품 '시가 된 폭포' (고서, 싱글 채널 비디오, 12분 24초, 680x200cm, 2021)를 볼 수 있다. 6.8m 높이의 가벽에 고서를 설치한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이다. 고대 갑골문부터 추사의 세한도에 이르기까지 5300권의 책에서 받은 문자 데이터로 만든 문자 이미지는 인간의 존재를 지탱해온 정신적, 역사적 가치를 상징한다. 문자들이 마치 팝콘 송이처럼 흘러내린다.
작품 '분열하는 인류'는 벽 하나를 두고 서로 다른 화살을 마주하고 있다. 한쪽에선 열매 '실'자가 끊임없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뒷면으로 돌아가면 거울에 꽂힌 화살이 나(관객)를 향한다. 아니, 내가 쏜 화살인가? 구분이 안 되는 모호한 상황에 직면한다.
'DNA 산수'는 사공도 시품첩에서 '웅혼'과 충담', 왕희맹의 '천리 강산도'를 작가의 DNA 데이터와 그에 따른 빛 신호로 재해석함으로써 작가 자신과 산수가 하나 됨을 표현한다. 원형 거울과 영상이 서로 마주하며 배치된 공간에 관객이 직접 투영되도록 연출해 관객 또한 작품의 일부가 되도록 연출했다. 주체와 객채가 구분되지 않는다. '반전된 빛'은 마주할 수 없는 해와 달의 글자가 만나 밝을 '명'자를 만들었듯이 반전에서 공존의 의미를 찾는다.
'시화 일률-생명의 봄, 웅혼, 금강전도 연작'은 작가의 DNA 데이터로 동양고전 산수화 반시직의 '웅혼',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곽희의 '조춘도'를 그린 것이다. 존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디지털로 시각화함으로써 작가는 작품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작품 '뿌리들의 일어섬'은 이를 위해 작가 자신과 가족들의 DNA 데이터를 분석해 만든 작품으로, 결국 가족 단위로 형성된 인류 전체로 연결한다. 초연결 시대의 공동체와 인류의 유기적인 관계와 그 속에서 이루어진 자아의 뿌리와 근본을 찾는다는 메시지다.
이이남(52)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조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미술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동서양의 고전회화와 미디어아트를 접목해 일명 '움직이는 회화'로 유명한 그는 예술과 AR, VR, AI 등 첨단기술을 접목하는 시도를 꾸준히 해 온 실험성 강한 작가다. 2019년 영국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백남준 회고전', 주벨기에 한국문화원(브뤼셀, 벨기에, 2021), 형이상학 갤러리(타이베이, 대만, 2020), 갤러리 지브라 스트라트(겐트, 벨기에, 2016), 가나아트센터(서울, 2014) 등 70여 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전남도립미술관 개관 특별전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다> (전남도립미술관, 광양, 2021), 4.27 남북정상회담 <평화, 새로운 시작> (판문점 평화의 집, 경기도 파주, 2018) 등 800여 회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작품은 아시아미술관(샌프란시스코, 미국), 소더비(홍콩 본사, 홍콩), UN본부(뉴욕, 미국),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워싱턴, 미국), 국립 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식물원, 전남도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박물관 등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