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그 정자를 찾아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붓에 물감을 묻혀 도화지나 캔버스를 채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채화를 배우면서 보니 색칠 이전에 중요한 것이 스케치 혹은 드로잉이었다. 기초적인 스케치가 잘 된 다음에야 색을 칠 할 수 있고 그림도 그럴듯하게 나오는 것이다.
스케치란 표현에 앞서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는 과정이다. 정확하게 관찰해서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구성이 약간 엉성하더라도 잘 관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확실하게 차이가 난다. 나만의 해석은 그다음 단계인 것 같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그림도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정물화를 몇 개 그리고 나서 풍경화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예전에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꺼내보니 그림의 소재로 적당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핀터레스트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창덕궁 후원의 정자 사진을 찾아서 그걸 그리기로 했다. 작년 여름에 비원에 갔던 생각도 나고 , 사생 대회하는 기분을 내 보기로 했다. 연못가에 정자가 있고 오래된 나무가 연못 위로 가지를 뻗어 물 위에 비치는.. 아마도 5월쯤의 풍경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어렵다. 한국 전통 건축물 지붕이 암기와, 숫기와가 따로 있고 지붕 아래에는 단청이 숨어있다. 그것을 표현하자니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기둥도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사진을 보고 그리려다 보니 정확한 디테일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작년 여름에 비원에 갔다가 사진을 찍었었는데 얼마 전 다 지워버린 게 후회스러웠다.
수채화 선생님은 “지붕 구조를 확실하게 관찰하고 그려야 한다”면서 “어렵지만 재미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수채화반 친구는 “ 실제 가 보면 사진으로 보는 것하고 다르니 반드시 가보고 그려라”고 조언을 해 준다.
그땐 갈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남이 찍은 서진을 보고 대충 그리는 것보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그려야 할 것 같아 일요일 아침에 채비를 하고 나섰다. 비원에 가서 그 사진 앵글 그대로 담으리라 다짐하며 푹푹 찌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에 갔다.
창덕궁 관람은 자유관람이지만 후원(비원)은 가이드 투어만 가능한데 마침 11시 투어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름이라 투어를 단축해서 하고 있었다. 내가 찾는 사진 속 정자를 과연 만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른 풍경화 소재라도 건지기를 바라며 땡볕 아래 투어에 참여했다.
한국 조경문화의 정수, 궁궐 조경 중에서 가장 빼어난 창덕궁 후원은 역시 대단하다.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우거져 그늘을 만들어 주긴 했지만 정말 더웠다. 모자 쓰고 , 양산 쓰고, 부채를 부치면서 손풍기로 얼굴의 열을 식히며 열심히 설명해 주는 가이드를 따라 걸었다.
연 잎이 푸르른 부용지와 부용정을 지나 드디어 사진으로 수없이 봐온 그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의 이름은 관람정이었다. 역시 와서 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정자의 모양이 타원형인 줄 알았는데 부채를 편 모양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관람정은 전국 유일의 부채꼴 모양 정자이다. 임금님이 좀 더 시원한 조망을 갖고 이 나라를 잘 다스릴 구상을 하시라고 이렇게 디자인한 것이리라 짐작이 된다.
나중에 자료를 보니 현판은 파초잎 모양이라고 하는데 그날은 미처 확인을 하지 못했다. 관람정은 한반도 모양을 닮았다는 연못에 사뿐히 들어앉아 있다. 돌다리에서 보니 사진의 그 앵글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는 훨씬 더 자라 가지를 연못 위에 드리우고 있다. 물 색깔은 녹조 탓에 탁했지만 역시 멋진 풍경이다.
관람정 뒤로는 독특한 디자인의 존덕정이 있고 언덕 위에는 승재정이 있다. 연경당 가는 길목에 애련정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조그마한 건물이 조밀하니 탄탄하다.
창덕궁 비원은 이렇듯 인공 연못을 조성하고 풍경과 어울리는 다양한 모양의 정자를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각양각색의 정자 가운데 내 마음의 정자를 꼽으라면 이제부터 관람정이라고 답하겠다. 더위를 뚫고 힘들게 찾아가 본 관람정, 잘 그려보고 싶다.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 직업 탓으로 돌린다. 그래도 덕분에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 나들이 잘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 마음은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