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도립미술관 , 12월 1일까지
먹의 농담을 이용해 그리는 수묵(水墨)은 채색화와 비교해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흑과 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는 작은 사물부터 우주의 정신까지 무한하다. 그러기에 선비들은 정신과 뜻을 표현하는 수준 높은 은유의 기법으로 수묵을 익히고 작품으로 남겼다. 예부터 학문과 풍류를 바탕으로 한 선비 정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수묵을 꼽은 이유다. 서구 현대미술의 확산으로 크게 위축되고 관심에서 멀어진 듯하지만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수묵정신은 한국 미술의 한 축으로 꿋꿋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북 완주군 모악산 공원에 자리 잡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수묵정신’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우리 전통 정신과 뜻을 표현해 온 수준 높은 메타포로서의 수묵을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할 시대정신과 미감으로 재조명하면서 현대 수묵화의 새로운 확장 가능성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전시다.
전북도립미술관 김은영 관장은 “수묵은 그 자체로 물질적 요소이지만 사상과 예술의 의미 부여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아온 우리 전통 예술의 정수”라고 말하면서 “한국 수묵화의 핵심적 정신과 형식을 탐색하고 수묵이 갖는 시대정신을 조명하고 재조명함으로써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 수묵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미래 좌표를 설정해 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전시는 전통, 현실, 추상, 실험이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이뤄졌다.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추사와 쌍벽을 이뤘던 조선 후기 서예가 윤원(允遠) 이삼만(1770~1847)과 같은 전통 서화가부터 대중문화 아이콘의 초상을 수묵으로 그리는 젊은 작가 손동현(39)까지 무려 한 세기에 걸쳐 분포돼 있다. 한국 수묵 사상의 넓이와 깊이가 한층 두터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실’ 섹션은 ‘시대와 함께 걷다’라는 주제로 이응노, 장우성, 김호석의 작품을 보여준다. 수묵화는 종종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자연과 이상적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으로 간주되지만 그것은 큰 오해다. 화가들은 사회 현실을 직접 묘사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자연을 통해 세태를 풍자하면서 사회를 갱신하는데 기여해 왔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 재현된 현실은 실재하는 현실보다 더 진정성이 있음을 웅변한다.
이응노의 그림은 1960년대 후반 동베를린 사건과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깨달은 지혜, 즉 인간 본연의 약동하는 생명력이 국가의 폭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이응노 화백이 옥중에서 그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장우성의 그림은 풍자가 갖는 힘이 얼마나 날카롭고 강한가를 보여준다. 김호석은 우리 시대의 초상이 얼마나 파편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 속에 잠재하는 시대성과 사회성을 포착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다.
‘전통’에서는 이삼만, 이정직, 황욱, 송성용의 글과 그림을 통해 수묵화의 정신이 전북의 문화적 배경과 가치로서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상’은 ‘본질을 탐구하다’는 주제로 수묵의 새로운 실험과 현대화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해 온 권영우, 서세옥, 송수남의 작품을 보여준다. 권영우는 포장지 노끈 등 오브제를 활용해 구멍을 내거나 뜯고 찢는 작업, 서세옥의 간결한 공간 구성과 먹의 발묵, 비정형의 서체 추상을 감상할 수 있다. 서구 미술사조를 수용해 문인화풍의 수묵담채에 앵포르멜 방법론을 결합한 송수남의 수묵 추상은 큰 울림을 준다.
마지막 ‘실험’에서는 소재와 표현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소재와 접근방식으로 수묵의 영역을 넓혀가는 작가들의 작품을 만난다. 황창배, 김호득, 이철량은 서구화의 영향 아래 수묵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화의 새로운 조형을 위해 진전된 혁신을 시도한 화가들이다. 이이남, 손동현은 새로운 세대의 패기로 수묵의 현대성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차명희는 균형된 시선과 절제된 형식으로 자신의 시각언어를 구축하고 있다.
전북 예술의 구심점으로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는 전북도립미술관의 김은영 관장은 “전통은 과거로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해야 할 새로움”이라면서 “전북의 예술적 전통이 수묵 서화 전통에서 비롯됐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전통과 현대를 잇는 수묵화의 새로운 확장 가능성을 확인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