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에브, 빛과 색채로 빚은 진실의 건축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작품을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각 작품이 나름의 스토리가 있고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 투레트 수도원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빛으로 빚어진 영성의 공간, 라 투레트 수도원은 르 코르뷔지에의 예술혼이 만들어낸 역작이다.
원래 이곳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으나 내가 방문했던 시기에는 자리가 없어서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아쉬운 대로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방문(매주 일요일 오후 2시와 3시 두 차례)을 예약해서 내부를 관람하는 계획을 세웠다.
라 투레트 수도원 Couvent de la Tourette 은 프랑스에서 제3의 도시로 꼽는 리옹 Lyon에서 30㎞ 정도 떨어진 조용한 시골마을 에브 쉬르 아브렐 론(Eveux-sur-Arbresle Rhone)에 위치한다. 대중교통은 3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아브렐 기차역이 있을 뿐이어서 승용차나 택시를 타야 한다. 대절 택시를 타고 고불고불 언덕길을 한참 올라 키 높은 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선 진입로에 도착했다. 맑은 바람이 부는 화창한 초가을의 일요일, 숲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르 코르뷔지에의 수도원을 방문하러 온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예약한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수도원은 언덕 경사면에 남향으로 서 있다. 뒤로는 우거진 숲으로 연결되는 산책로가 있다. 저 멀리 언덕 아래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지평선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평화로운 풍경, 르 코르뷔지에가 수도원 설계를 의뢰받고 쿠튀리에 신부의 안내로 사이트를 방문했을 때의 그 풍경일 것이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리옹의 도미니크회에서 세웠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도시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신앙을 연구하고 전파하는데 2차 대전 후 종교에 귀의하려는 젊은 이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수도원을 리옹 부근에 짓기로 했다. 무신론자인 르 코르뷔지에가 이 수도원의 설계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개혁적인 성향의 마리-알랭 쿠튀리에 신부(1897~1954)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던 쿠튀리에 신부는 세속 화가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대신 가톨릭 신부가 되어 1930년대부터 종교 예술 운동을 펼쳤다. 그는 L’Art Sacre라는 잡지를 간행하며 종교 예술과 현대미술의 접목을 시도했던 그는 전쟁 후 폭파된 성당 등 종교시설 재건 책임자가 되어 프랑스 종교건축 현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 롱샹성당 재건 작업에 르 코르뷔지에를 추천한 것도 쿠튀리에 신부였다. 르 코르뷔지에와 많은 교감을 하고 그의 예술적 재능과 건축가로서의 능력, 열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그는 “재주 없는 신자보다는 신앙 없는 예술가에게 맡기는 게 백배 낫다”면서 도미니크회를 설득해 르 코르뷔지에가 라 투레트 수도원 건축을 맡도록 했다.
수도원 부지를 처음 방문한 르 코르뷔지에는 지평선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부드러운 풍광에 감탄하며 “이 땅의 지형과 자연에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을 짓는 것은 죄악일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원은 1953년 설계를 시작해 1956년 첫 삽을 떴고, 1960년 10월 19일 헌당식이 열렸다. (롱샹성당의 경우 1950년 초 설계를 시작해 1953년 봄 착공하고 1955년 6월 헌당식을 가졌다. ) 르 코르뷔지에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쿠튀리에 신부는 근무력증으로 투병하다 1954년 2월 9일 세상을 떠나 안타깝게도 롱샹 성당과 라 투레트 수도원 완공과 헌당식을 모두 볼 수 없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롱샹성당을 착공하던 해에 라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시작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종교 가톨릭과 현대미술 간의 간극을 좁히는데 주력했던 쿠튀리에 신부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을 맡기면서 한 가지를 부탁했다, “많은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이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달라”라면서 남프랑스의 르 토로네 수도원 (Le Thoronet, 프랑스 남동부 바르 지방)을 방문해 볼 것을 권유했다.
폐허가 된 채 자연의 일부가 된 그곳에는 고요와 침묵이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이미지는 마치 아름다운 시 같았다. 롱샹성당에서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처럼 하얀 볼륨을 가진 비정형의 자유로운 디자인으로 예술성을 추구했던 르 코르뷔지에는 라 투레트에선 영적인 삶을 지향하는 수사들을 위해 보다 더 종교의 본질로 접근했다. 소박(투박)한 재료인 콘크리트 외벽으로 사용하되 하늘의 빛에 집중한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 피렌체의 에마 수도원에서 발견한 순수함과 단순함의 미학, 르 토로네 수도원의 고요함을 담은 수도원 건축을 추구했다. 여기에 더해 그가 줄곳 주창해 온 현대 건축의 기본 요소들을 충실하게 적용하고, 화가로서의 예술적 감각을 살렸다. 빛과 색채로 충만한 궁극의 종교 건축은 이렇게 완성됐다.
“건설자 constructeur는 축조 예술을 위해 양손, 즉 공학자의 왼손과 건축가의 오른손 사이를 부지런한 대화를 통해서 친근하게 연결시키는 새로운 직업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사유 중)
라 투레트 수도원은 종교건축으로서의 고요함과 숭고함을 갖춘 현대 수도원 건축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구조와 형태는 수학에 기반한다. 그러면서도 예술가로서 르 코르뷔지에의 감성이 곳곳에 묻어난다. 라 투레트 수도원이 종교건축이면서도 현대미술 작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가 아닐까. (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를 보면서 쇼스타코비치의 <Gadfly Suites OP.97 >중 8번 ‘Romance’를 들었는데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공간의 아름다움이 음악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르 코르뷔지에는 작품으로서의 건축에 대해 “단순한 볼륨에 길이가 부가되고, 비례가 달라질 때에 그 건축물의 개성이 드러난다.” 고 했는데 라 투레트를 방문해 보면서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비탈진 땅에 자리 잡은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의 외관은 너무나 검소해서 무미건조하고 무뚝뚝해 보였다. 콘크리트의 외벽은 무척 거칠어 비게로 사용했던 나무의 결이 아직도 살아있다. 언덕배기 아래로 내려가 보니 거대한 필로티들이 마치 로봇의 긴 팔처럼 콘크리트 구조물을 받치고 있었다. 필로티 사이로 바라본 건물의 라인은 기하학적이었다. 삼각형 뿔, 직사각형, 원통.. 특이하다. 안에 들어가면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한 바퀴 돌고 오니 대충 시간이 되어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다. 진입로에서 들어와 오른쪽에 있는 수도원의 입구는 정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수도원에서 천정의 높이를 비롯해 모든 치수의 기준을 키 183㎝의 건장한 남성을 기준으로 했다. 콘크리트 정사각형은 키 183㎝의 건장한 남성이 팔을 쭉 펴서 들었을 때의 높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이 문을 통과함과 동시에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 로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입구에서 연결되는 층이 3층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독특한 방식으로 수도원을 설계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지붕의 높이부터 정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경사지에 자리 잡은 건물은 지평선을 거스르지 않는다. 경사지에 서있지만 필로티를 만들어 3층과 2층, 개인실에서도 탁 트인 전망과 지평선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다 ‘계획’이 있었다. 공간의 디자인과 볼륨, 빛이 들어오는 시간과 방향, 그림자, 그곳에 있는 사람의 동선과 그곳에서 느껴주었으면 하는 감동 하나하나까지 미세하게 고려한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외부에서 봤을 때 삼각뿔처럼 보인 것은 기도실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천장에 흰색 페인트 칠을 해 놓은 단순한 공간에서 혼자, 혹은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 들어가서 묵상하면서 신을 만나는 장소다.
그는 수도원의 특성을 살려 영적인 수행을 위한 사적 공간과 공동체의 활동을 위한 공공공간으로 구분해 디자인했다.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사적 공간은 4층과 5층에 있다. 나머지 세 개 층에 크고 작은 예배실과 식당, 회의실, 도서관을 배치했다. 2층의 중앙 로비에서 십자가 형태의 길이 사방으로 연결된다. 수도원 중앙 로비에 사방으로 연결된 불규칙한 십자가 형태의 길이 나 있다.
남쪽으로 커다란 창이 나 있는 대식당으로 들어가면 동선은 자연스럽게 창을 향하게 된다. 창틀은 단조롭지 않도록 폭과 높이에 변화를 주었다. ‘몬드리안 패널’이라는 이름에 잘 어울리게 빨강, 파랑, 노랑, 녹색의 원색으로 칠한 문과 벽들이 단조로운 건물에 경쾌한 리듬감을 준다.
르 코르뷔지에는 벽에 떨어지는 빛을 활용한 채움과 비움의 공간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빛이 얼마나 공간의 형식과 모습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드는지 느낄 수 있는 곳은 대예배실과 계단식으로 제단이 설치된 크립트(Crypt, 성당이나 교회의 지하에 있는 방)이다. 어느 곳이나 인공조명이 없이도 공간은 빛으로 풍요로웠다. 대예배실은 사각의 천장에서 들어오는 빛이 절묘하게 의자의 성서대를 향해 떨어진다. 약간의 경사를 만들어 오르막으로 오르면 제단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왼쪽 벽에 낸 작은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들이 공간에서 서로 만나면서 성스럽고 고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건물 밖에서 봤을 때 지붕에 둥근 모양의 굴뚝처럼 보이던 것이 크립트의 천창이었다. 오르막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블록과 테이블 형태의 제단을 두었다. 그 안에 마치 있으니 빛으로 만든 조각품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가장 위층에 있는 방은 수도사들이 잠자고 독서하고 사색하고 묵상하는 공간이다. 테이블과 책장, 1인용 침대와 작은 옷장이 전부인 소박한 방이다. 협소하지만 밖을 향한 창문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어 개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번에는 하룻밤 묵는 계획이 이뤄지지 않아서 공간을 직접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다시 찾아와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좋다. 기다림은 즐겁다.
1887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르 코르뷔지에의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느레(Charles-Edouard Jeanneret)이다. 1917년 파리에 정착했으며 젊은 시절 에두아르 페레의 소개로 만난 화가 아메데 오장팡과 함께 순수주의(le Purisme)를 제창했고 예술 평론지 '에스프리 누보 Esprit Nouveau'를 간행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등 급진적인 주장과 함께 저서 '건축을 향하여'(1923) 등을 발표하며 문화예술계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메종 라로슈, 빌라 사부아, 롱샹 성당, 위니테 다비타시옹 등 혁신적인 그의 작품은 늘 화제와 논쟁의 중심에 섰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개척자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이듬해인 1965년 8월 27일 지중해 연안에서 수영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거장에 대한 예를 갖춰 프랑스 정부가 국장을 준비하던 중 그가 써두었던 메모가 발견됐다. 자신의 시신을 라 투레트 수도원의 교회에 하룻밤 안치해 줄 것을 부탁하는 글이었다. 무신론자로 살았던 그가 자신이 설계한 성소에서 지상에서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지 알 수 없다. 그는 신을 만났을까? 만나서 무슨 말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