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 , 15일 롯데콘서트홀 KBS교향악단 마스터시리즈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세게 내리치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장렬하게 끝났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탄성이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연주를 마치고 일어서 관객에서 인사하는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머리에는 마라톤 완주자가 누리는 승리의 월계관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년 4월 1일 ~ 1943년 3월 28일) 탄생 150년을 맞은 2023년 여러 국내외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을 들려줬다. 마치 마라톤 경주를 하는 것 같았다. 우열을 가리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만 굳이 가리자면 승자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이틀에 걸쳐 연주해 낸 러시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b.1972) 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루간스키는 KBS교향악단과 함께 12월 13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마스터스 시리즈’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선보였다. 지휘는 러시아 출신의 스타니슬라프 코차놉스키(42)가 맡았다.
첫날(13일) 루간스키와 KBS교향악단은 80여분 동안 협주곡 1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협주곡 2번을 들려줬다.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워낙 어렵고 복잡해서 한 곡을 연주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세 곡을 한 무대에서 연주한다니. 게다가 이틀 뒤 무대에선 2곡을 더 연주한다. 마라톤 같은 전곡연주를 무리 없이 완주하려면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멀리 강원도에 가 있었던 까닭에 KBS FM라디오로 살황중계를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루간스키의 연주는 섬세하고 우아하며, 파워플하면서도 정확했다. 1번은 시작은 강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카덴차(협연자의 솔로 부분)에선 음표를 정확하게 짚어가며 감동을 실었다. 이어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에선 절제미를 보여줬다. 2부의 협주곡 2번에서 루간스키는 이 곡을 위해 비축했던 에너지를 마술처럼 서서히 쏟아냈다. 루간스키는 무수히 많은 명반을 발매해 호평을 받았으며 3년 연속으로 황금디아파종상을 수상한 최초의 피아니스트다. 아마도 음악적 해석이 뛰어날뿐더러 피아니스트로서 정확한 타건에서 오는 것일 텐데 FM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곡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진행자(음악칼럼니스트 최은규)는 연주가 끝나고 흥분된 목소리로 ‘긴 시간 동안 전혀 집중력이 흐트러짐이 없었다. 매우 지적인 해석으로 연주를 했다’고 평했다.
두 번째 날(15일)은 다행히도 음악회장에서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눈비를 헤치고 서울에 올라온 보람이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훌륭한 공연이었다. 러시아 작곡가의 곡을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협연으로 러시아 지휘자가 이끌어내는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달려온 보람은 있었다.
이 날의 프로그램은 협주곡 4번과 3번. 루간스키는 약간 피로한 듯(연주 일정을 하고 있어서 드는 선입견일 수도) 했지만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KBS 교향악단의 연주가 좀 무겁고 느리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피아니스트가 잘 리드를 해 주었다.
곡의 화려함은 2번이나 3번과 비교할 수 없지만 4번은 작곡가가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완성한 만큼 무척 짜임새 있고 유려하다. 1927년 3월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가진 초연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갈고닦아 1941년 결정판을 냈다. ‘슬라브적인 선과 또렷이 살아있는 풍자적 성격, 강렬하면서도 장대한 피아노의 음향까지 골고루 맛볼 수 있는 독특한 걸작’이 4번이다. 우수 어린 서정성과 음울함이 감정을 파고드는 곡이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로 정평이 난 루간스키의 연주는 명료했다. 어느 순간 부드럽고 영롱한 소리에 오케스트라에 하프가 있는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오케스트라에 피아노 소리가 묻히는 일이 없이 무소의 뿔처럼 연주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3번은 1909년 9월 라흐마니노프 별장이 있는 러시아 이바노프카에서 만들어져 같은 해 11월 뉴욕에서 초연한 곡이다. 다소 무겁고 거대한 스케일 때문에 대중에게 친숙해지는데 좀 시간이 좀 걸렸다. 1930년 우크라이나에서 온 신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이곡을 완전히 소화했고, 그리고 임윤찬이 제16회 반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에서 연주하면서 친숙해진 바로 그 곡이다. 올해 여러 차례 듣긴 했지만 루간스키는 마지막 스퍼트를 내듯이 피아노 건반 위에 에너지를 모두 쏟아냈다. 곡이 끝나자 완주한 피아니스트에게 기립박수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두 번의 공연을 다 봤을 것이다.
수없이 커튼콜을 하고 나서 손가락이 성할 것 같지 않은 루간스키는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Op.32 No.5를 들려줬다. 그리고 또 커튼콜이 이어지고 이번에는 지휘자 코차놉스키가 지휘대에 올라 오케스트라 앙코르로 이날 2부에서 연주한 피아노협주곡 3번 3악장 중간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멋진 앙코르 연주가 끝나고 긴 코스를 완주한 루간스키와 코차놉스키는 뜨겁게 포옹했다. 공연장을 찾은 대다수 관객은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날 연주가 끝나고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계단까지 길게 이어지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러시아 악파를 잇는 거장으로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에게 가르침을 받은 루간스키는 199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로 이름을 알렸다.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등 러시아 레퍼토리의 최강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쇼팽, 드뷔시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누구보다 라흐마니노프 연주의 최강자로 꼽히는 그는 2023년 바쁜 한 해를 달려왔다. 파리 샹젤리제극장과 런던 위그모어홀 리사이틀, 브뤼셀, 베를린, 프라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에서 독주했고 여름에는 코차놉스키 지휘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KBS 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년의 피날레를 제대로 축하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