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가까이 트레치메 트레킹을 하고 나니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불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음 숙소를 향해 출발. 가는 도중에 날씨가 개어서 아직 해가 중천인 시각(오후 9시 넘어서까지도 훤했으니 오후 7시쯤이면 아직 낮시간)에 호텔 치아사 살라레스(Ciasa Salares)에 도착했다. 큰길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와서 숲 속에 자리한 호텔 뒤로 근사한 산이 있는 5층 규모의 호텔이다. 앞서 묵은 호텔코로나와는 별 하나 차이였는데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이 달랐다. 차가 도착하니 어느 사이 잘생긴 포터가 짐수레를 끌고 나와 있었고, 프런트 데스크에서는 우리의 도착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여직원들이 환한 미소로 친절하게 맞아준다. 깨끗하고 정감 있고 현대적인 스키리조트스타일의 호텔이다. 엘리베이터도 깔끔하고, 빠르고 객실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가문비나무로 내부 인터레어가 되어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웰컴 메시지와 함께 귀여운 사과와 쿠키가 놓여 있고 침구와 어매니티도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호텔 내의 식당(이 호텔에 3개의 식당이 있었다)에서 저녁 식사도 준비되어 있다고 하기에 메뉴를 보니 토끼고기, 사슴고기 특식이다. 정성스럽게 마련한 특제 요리일지라도 익숙지 않은 토끼고기, 사슴고기는 거부감이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 주변의 스테이크 하우스를 추천받았다. 자동차로 8분 거리에 위치한 스테이크하우스(Steakhouse L’Fana)는 지역 맛집인 듯 분위기도 좋고 맛도 좋은 식당이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무사히 하루를 마친 것을 자축했다.
아침이다. 아침식사는 호텔 코로나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호텔 코로나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음). 웨이터 아저씨가 방 호수가 적혀있는 테이블로 안내를 해 주어서 창가로 갈까, 뷔페 가까운 데에 앉을까 우왕좌왕하지 않게 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할 때 자리 잡는 것도 순각적이긴 하지만 스트레스 거리다. 늦게 가면 전망이 좋은 곳은 모두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고, 사람이 많으면 미처 앞사람이 먹고 간 테이블이 정리가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작은 배려이지만 테이블을 정해 놓으니 그런 문제없이 차분하게 앉아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아침 식사 후에 어제저녁에 시간이 늦어서 이용하지 못했던 수영장에 잠시 몸을 담그고 나서 여유 있게 체크아웃을 했다. 호텔에서는 가는 길에 마시라며 물까지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주었다. 마지막까지 마음에 들었던 호텔이다.
오늘은 서쪽의 오르테세이(Ortisei)로 이동해, 숙소 체크인을 한 뒤 곤돌라를 타고 세체다(Seceda, 해발 2518m)에 오르는 일정이다.
돌로미티 여행 계획을 세우려고 마음을 먹고 나서 한참을 헤맸던 이유는 무엇보다 낯선 지명들 때문이었다. 겨우 주워들은 단어들이 마을 이름인지, 지역 이름인지, 산봉우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여행 가이드인듯한 블로거가 올려놓은 4박 5일 트레킹 루트를 따라 지명을 죽 나열해 보고, 주요 포인트가 어디인지를 가늠해 보기도 했지만 다녀온 친구의 설명이 결정적으로 도움이 됐다. 이번에 정말 놀란 것은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들이 돌로미티를 여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규모 단체도 있었지만 자동차를 렌트해 여행하는 사람, 기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돌로미티를 여행하는 루트는 베로나 쪽에서 올라가 볼차노(Bolzano)에서 시작해 코르티나 담페초 쪽으로 이동하는 방법, 그러니까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거나, 그 반대의 루트로 베니스에서 출발해 동쪽의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오르티세이를 거쳐 볼차노로 가는 방법이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쪽에서 올라오는 방법도 있는데 인스브루크, 볼차노와 코르티나 담페초 사이에 ‘돌로미티’라고 부르는 엄청난 규모의 거대한 산맥과 암봉들이 놓여있다. 서쪽의 출발 도시인 볼차노는 숙박시설도 많고, 돌로미티의 주요 관광지로 가는 대중교통(버스)이 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볼차노를 베이스로 삼아 여행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돌로미티 지역의 대부분 호텔에서는 버스 이용권(하루 혹은 일주일치)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이 티켓을 이용해 남티롤 지역에서는 어디든 무료로 갈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면 경제적이고 마음은 편하지만 배차간격이 워낙 뜸하다 보니 기다리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산에 갔다가도 시간에 맞춰 서둘러 내려와야 하는 등 단점이 있다.
반면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경우는 대중교통 노선이 없어서 자동차를 렌트하는 게 적절하다. 확실히 서쪽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반면 동쪽의 주요 지점인 트레치메 등지에서 만난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렌터카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 코스상 베니스에서 출발하게 되었으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지만 다음번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그건 그렇고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오르티세이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2차선 도로가 꼬불꼬불하여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 같았다. 여기에 모토사이클과 산악자전거가 수시로 나타나는 통에 운전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경치는 무지 좋다. 오르막 길을 달리다가 중간에 좀 여유가 있는 곳이 있어서 잠시 멈추고 보니 정말 멋지다. 뾰족뾰족한 산맥이 끝이 없고 눈앞에는 들꽃이 만발한 자그마한 평원들이 군데군데 뒤섞여 장관이다. 이 길을 오토바이와 스포츠카들이 경쟁하듯 쌩쌩 달리고, 산악자전거는 내리막 길을 쌩하니 내려간다. 무섭지 않나? 보기에도 아슬아슬한데 이런 스릴을 즐기러 일부러 멀리 독일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오후 1시 조금 지나 오르티세이에 도착했다. 숙소는 빌라안젤리노. 호텔 안젤리노의 부속 B&B호텔인데 업그레이드를 받아서 산 전망과 함께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발코니가 있는 방이었다. 다음날 숙소를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여서 하루를 더 같은 방에서 묵으려고 물어보니 같은 방은 다른 고객이 들어올 예정이고, 방을 옮겨야 한다기에 없던 일로.
오르티세이는 해발 1238m에 위치한 예쁜 도시였다. 가르데나 계곡(Val Gardena) 지역의 중심도시로 오래전부터 스키리조트로 발달한 곳이라 호텔도 많고 식당도 꽤 많은 분위기 좋은 곳이다. 도시 내에 걸어서 가는 거리에 돌로미티의 또 다른 랜드마크인 세체다(Seceda)와 고원지역인 알프 디 시우시( Alpe di Siusi) 등으로 갈 수 있는 곤돌라 탑승장이 있다. 이곳을 가려면 무조건 오르티세이로 와야 한다. 곤돌라 하루권을 끊어서 반나절씩 나눠 두 곳을 모두 갈 수도 있지만 시간이 안되니 이날 오후에 세체다를 가기로 했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쉽게 세체다 탑승장을 찾을 수 있다.
돌로미티에는 곤돌라는 정말 수없이 많아서 수없이 많은 산봉우리로 연결된다. 어찌 이런 것을 다 건설해서 사용하는지 정말 놀라운 사람들이다. 곤돌라는 매번 왕복권을 사면 무지 비싼 편이다. 애완견을 데리고 타는 사람들이 많아서 개들도 탑승료를 낸다. 세체다 왕복에 45유로(개는 5유로)다. 정말 비싼 편이다.
이번에 기간이 짧은 탓에 이용을 하지 못했는데 두 번 이상 탄다면 이들 곤돌라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슈퍼섬머’권을 구입하는 것이 여러모로 경제적이다. 우리나라 스키장의 시즌권 같은 것인데 이용하는 코스도 다양하고 거리(고도)가 어마어마하다. 슈퍼섬머권을 사서 밑천 뽑겠다고 함부로 탔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내려오는 마지막 곤돌라 시간을 잘 계산해서 놓치는 일이 없어야겠다. 탑승 지점에 마지막 곤돌라 시간이 적혀 있는데 기후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눈여겨봐야 한다.
이리하여 중간에 한번 갈아타고 세체다에 올랐다. 이날은 곤돌라가 편하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대부분의 코스가 거의 다 가서 내려주고 마지막에는 걸어서 올라가도록 되어 있어서 편한 신발보다는 트레킹화를 신는 것이 좋다. 곤돌라에서 내리면 오른쪽으로 세체다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보인다. 세체다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장소가 마련이 되어 있고 그 아래로 계곡을 걸어서 다음 봉우리가 보이는 지점까지 가면 좀 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걸어서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다시 올라오려면 각오가 필요하다. 그래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대자연을 마주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하고, 멋진 사진도 건질 수 있다. 왼쪽으로는 언덕이 보이는데 십자가 상이 있는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너머의 계곡 풍경도 근사하다.
그저 멋지고, 근사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던 돌로미티. 자연이 큰 위안을 준다는 말이 무슨 얘기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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