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일부터 7월 6일까지 리움미술관
현대미술의 고정된 형식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탐구해 온 세계적 작가 피에르 위그(Pierre Hugues, b. 1982 )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이 리움미술관의 올해 첫 전시로 열린다. 2월 27일부터 7월 6일까지 리움미술관 블랙박스와 그라운드갤러리에서 열리는 《리미널(Liminal)》전에서는 동시대 미술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손꼽히는 피에르 위그의 대표작들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리움미술관이 피노컬렉션(Pinault Collection)의 베니스 소재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 미술관과 협렵해 제작을 지원한 <리미널>, <이디엄>, <카마타>(2024-진행) 등 신작과 대표작 <오프스프링>(2018), <휴먼 마스크>(2014), 수족관 작품 등 최근 10여년 간 작가의 예술적 탐구를 조명하는 작품 12점이 공개된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전시 개막을 하루 앞둔 2월 26일 프레스 프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피에르 위그는 '인간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인데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이 있어 어렵게 느껴진다"면서 "이번 전시는 그의 작업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서 어렵다는 장벽을 깨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관계하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개체로 진화(재탄생)하는지를 상상하고 질문하며 전시를 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전시는 난해하기로는 역대급이다.
'사변적 허구'의 또 다른 세계
피에르 위그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질문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사변적 허구'로 간주한다. 그의 작업에서는 학습하고, 변화하고, 진화하는, 생물학적이거나 인공적인 주관성이 서식하는 세계에 대한 여러 형태가 제시된다. 전시장은 그가 설정한 섬세한 세계 혹은 환경, 즉 허구적 '시간과 공간'을 만나는 장소다. 그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체들이 진화하는 세계를 설정하고 그런 '유사' 환경을 만들어 관람객들이 불가능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며,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목도하는 또 다른 현실을 제안한다.
전시 제목이면서 작품 제목인 《리미널(Liminal)》을 작가는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로 설명한다. 즉 인간과 비인간,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세계이자, 존재 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환경을 가리킨다. 피에르 위그에게 전시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환경이다. 전시 《리미널》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들이 센서를 통해 주변 정보를 수집하고,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이를 해석하며, 관객의 개입에 따라 실시간으로 진화한다. 여기서 존재들은 순환하고 상호반응하며 복합적인 환경(milieu)을 형성한다.
프랑스 국립고등예술학교에서 수학한 피에르 위그는 초기에는 영상 작업에 집중하며 현실과 허구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실제 마을에서 가상의 축제를 올린 <스트림사이드의 날>(2003)부터 버려진 전통예술박물관을 몇 달간 점거해 일련의 사건을 전개한 <호스트와 클라우드>(2009-2010)까지 실시간 상황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다 우연적인 현실이 작품의 본질을 구성하는 <경작하지 않은>(2012)가 세계의 전환점이 된다. 특히 <애프터 어라이프 어헤드>(2017)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측을 피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변종들>(2022)을 통해 프로그래밍 차원으로 작업을 발전 시켰다. 최근의 대부분 작품들은 영상물이든, 설치물이든 작품 근처에 설치된 센서가 다양한 환경을 인지하고 적용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다. 작품들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전환한다.
전시장에서는 현실과 허구,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 사이에 있는 그 '무엇'(혹은 존재)들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은 출산을 앞둔 임신부의 배 모양을 본뜬 현무암 작품 <에스텔라리움>이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발전해가는 존재의 과도기적 상태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품 <리미널>에는 얼굴없는 인간 형상이 등장하는데 이 형상의 움직임과 시선은 센서가 포착한 환경 조건과 인공신경 조직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된다. 이 형상은 전시공간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외부 데이터를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가며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설정이다.
에릭 사티가 작곡한 '짐노페디'가 아주 느리게 들리는 가운데 조명과 수증기로 이뤄진 작품은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빛과 소리, 그리고 냄새를 다르게 표현하는 오감 체험형 작품이다.
19분 길이 영화 '휴먼 마스크'(2014)에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된 지역의 버려진 식당을 배경으로 소녀의 얼굴 가면을 쓴 원숭이가 등장한다. 원전 사고 이전 실제 식당에서 '일하던 원숭이'(로 설정된)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난 뒤에도 그곳에 남아 여기저기를 배회하면서 자기가 식당일을 할 때 했던 동작들을 반복하다가 뭔가를 기다리는 듯 멈춰있기도 한다. 인간의 부재 상황을 비인간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슬프다. 피에르 위그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 중 하나로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 소개됐고, 지난 해 푼타 델라 도가나 전시에서도 상영됐다.
전시장에는 살아있는 생물이 들어있는 세 개의 수족관이 설치되어 있다. <주드람 4(Zoodram 4)>(2011), <주기적 딜레마(Circadien Dilema (El Dia del Ojo))>(2017), <캄브리아기 대폭발 16(Cambrian Explosion 16)>(2018)은 진화하고 있는 세계 그 자체다. 수족관 안의 환경은 특별히 구성되어 있지만, 자연적 생태계를 재현한 것도 아니고, 완벽한 세트장도 아니다. 조건은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를 제시한다.
수족관 <주드람>에는 추상조각의 선구자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얼굴 조각작품 레플리카가 들어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물(게)이 움직일 때 이 조각도 살아있는 것 처럼 움직이지만 예측할 수 없다. <주기적 딜레마>는 멕시코 수중 동굴을 재현한 것이다. 수백만년 전 어두운 수중 동굴에 들어온 '테트라'는 시각과 관련한 유전자가 퇴화해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수족관에는 눈이 먼 테트라와 시력이 남아 있는 테트라가 공존한다. 수조의 유리는 변색유리로 주변 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고 이런 환경의 영향으로 수족관 속 물고기의 시력은 회복되거나 상실될 수도 있다.
물에 떠 있는 바위가 들어있는 수족관 <캄브리아기 대폭발 16>에는 5억4천만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 당시 출현한 고대종 두 종이 살고 있다. 원시 상태 이후 변화하지 않아 살아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이 생물들의 본능적인 행동은 개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되며 번식을 이어가며 반복된다.
불가능한 것을 시각화한다?
이처럼 전시 《리미널》은 불가능한 것, 있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상상하고 시각화할 수 있을까,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예측 불가능성을 가시화하고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생태적 환경을 제안하며,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거나 분리되면서 그 의미가 진화한다.
황금색 마스크를 운반하며 인간들의 언어와 유사한 알수없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이디엄>은 인간의 발성과 신경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성된 미지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인간의 상상력과 비인간의 인지로 생성되는 <U움벨트-안리>에서는 외부 환경이나 타자의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암세포 변환기>는 실제 실험용 암세포가 서식하고 지속적으로 분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여기서 만들어진 변화를 기록하는 현미경 이미지 데이터를 <U움벨트-안리>로 송출한다. <마음의 눈(S)>(2022)은 <U움벨트-안리> 화면에 나타난 형상을 발췌한 이미지가 물리적인 신체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허구적, 사변적 설정이 진화하고 프로그래밍이 도입돼 지속되는 것이 대형 영상 작품 <카마타>(2024~진행)이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우연히 발견된 인간 해골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해골을 중심으로 기계가 장례 의식 비슷한 움직임을 쉬지 낳고 수행한다. 끝없는 장례 의식을 소환함과 동시에 기계가 인간의 유해를 조사하게 될 먼 미래를 보는 듯하다. 영상은 전시 공간 안의 센서가 수집한 정보를 기반으로 화면에 송출되는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편집하는 것으로 시작과 끝이 없는 형태로 계속해서 편집된다.
피에르 위그는 본인의 작업에 대해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선형성을 벗어날 때 흥미를 느낀다. 역사를 넘어선 서사 밖의 허구에 관한 것이다. 시뮬레이션은 혼돈을 지날 수 있게 해 주는 여러 가능성의 투영이다”라고 말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작가의 최근 작업은 기존 인간 개념과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 인간 이후와 인간 바깥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며, “이번 전시는 작가의 이러한 상상이 감각적으로 시적으로 전환되며 관람객에게 강렬한 인상과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전시작들은 설명없이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전시장에 황금색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고, 블랙박스 전시장은 너무 어두워서 전시 작품에 몰입하기 어려우며, 실제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스토리텔링과 환경의 변화를 감지해 편집하도록 프로그래밍된다는 설정은 AI가 삶의 곳곳에 들어와 있는 현재 상황에서 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 해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진행된 푼타 델라 도가나 전시를 못 본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설명 없이 작품 자체만으로는 난해함의 벽을 넘기 어려울 것 같다.
리움미술관은 전시를 더욱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도록 연계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큐레이터 토크를 통해 작가의 작품세계와 전시의 기획 의도를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