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
메리 님께.
편지가 많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긴 숨을 쉬었다고 하면 제 마음이 다소 편할까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어서, 혹은 도저히 쓸 용기가 없어서 깊은 호흡으로 숨을 가다듬고서야 첫 줄을 이제야 띄어봅니다.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딱히 힘이 들었다거나 지쳤다거나 귀찮았다는 식의 간단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마도 저는 조금 천천히 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삶을 쪼개어 살고 있는 요즘에, 더욱이 하루의 짧은 찰나의 순간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나날들 속에서 천천히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죽음이라는 확정적인 마지막 결론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 여실히 느끼는 요즘. 매 순간이 내게는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임을 잘 알게 된 지금, 있는 힘껏 모든 찰나를 껴안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모든 순간에 놓인 모든 것들을 쉬이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곁의 사람들의 눈빛을 더 진득이 바라보며 그들의 예쁜 소리를 내는 입을, 그들의 역동적인 몸짓 언어들을 가득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공기 가득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 같은 그들의 언어가 내게 와 나만의 언어로 해석되는 기분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하게 들리는 그들만의 멋진 세계의 소리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전에는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던, 들리지 않던 많은 이야기들이 이제는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귀를 막던 손을 내려놓고 귀를 열었을 뿐인데 이 세상에는 참 예쁜 음악이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더군요. 미처 몰랐던 세계를 나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겠지요.
네,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울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이 일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저도 참 당황스럽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다소 우울에서 많이 바깥을 향한 상태라 그런 걸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마음을 바다라고 했을 때 단지 파도가 약하게 치고 있는 잔잔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뭐, 그것은 제게 별로 중요하진 않습니다. 일시적이든, 점진적이든 그 어떤 식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았을 때, 오늘도 전 충실히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찰나의 행복을 부지런히 바라보았기 때문이지요. 많이 웃고 또 많이 따뜻했습니다. 함께 웃었고 함께 온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유쾌한 대화와 오가는 미소들, 따뜻한 말로 전한 응원. 나는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았습니다. 그거면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메리 님, 다시 한번 편지가 늦어지게 되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사실 마음이 힘들어 가눌 길이 없을 때 글을 씁니다. 그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을 때 생각을 나열합니다. 때로는 도저히 단어나 문장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참 답답해요. 내 마음을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를 대어 보아도 맞지 않는 겁니다. 그럴 때는 글이 길어져요. 주절주절 넋두리하듯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그 양이 꽤 됩니다. 그럼, 이제 그게 저의 글이 됩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종이 위에 이야기를 뱉어내고 나면 그래도 좀 나아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마음을 나 자신이 들어준 것만 같거든요. 그래도 나 자신만큼은 나를 이해해 준 것 같아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봐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아마도 요즈음의 저는 스스로 당황스러울 만큼 행복의 풍경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거품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지 모르는 이 아름다운 배경 속에 주인공으로 조금이라도 더 남고 싶은 것 같아요. 아니,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더욱 만끽하고 싶은 것 같아요. 다시 어둠으로 가득한 방 안에 갇히게 되더라도, 그럴 걸 아주 잘 아니까 지금이라도 이 풍경 속에 있는 나를 그대로 두고 싶은 것 같아요. 최대한 편안하게. 예쁜 웃음을 지켜주고 싶은 것 같아요. 아름다운 그림 속 환히 웃고 있는 저를 바라보는 게 참 좋습니다. 행복해 보여요. 그저 이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네요.
변명이 길었네요. 그런 연유로 도통 글을 손에 잡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현실을 살고 있었습니다. 글로 도망치지 않고 삶을 똑바로 쳐다보았어요.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저는 도피처로써 글을 써 내려가고 있지 않아요. 그저 이 행복을 충분히 끌어안고 양분 삼아 다시 제 할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지요. 메리 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요. 그것 또한 제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고 싶거든요. 무언가를 파괴하면서 내 행복만을 고집하고 싶진 않습니다. 행복의 반대에는 늘 어떤 다른 모습들이 있을 테니까요. 분명 행복을 더욱 선명하게 해 줄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고난이든 고통이든, 다양한 형태로 내게 다가올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언제든 환영해 줄 생각입니다. 나는 분명 다시 행복을 향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제게 물어보셨던 봄을 맞은 소풍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좋겠네요. 저는 일상의 사이사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이라고 해서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예쁜 것을 보고 느낀 시간이었지요. 삶은 모든 순간이 여행인 듯합니다.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는데 조금만 시선을 이리저리 두어도 아름다운 것 투성이더군요. 꽃이 만개하기 전의 뒷산을 여행했을 적에는 꽃망울이 나뭇가지를 가득 수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예뻐 한참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형형색색의 꽃을 기다릴 때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그들만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모습이 감동스러웠습니다. 또 학교 앞을 지나는 여행길에서는 마침 하교 시간이었는지 아이들이 교문 밖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쁘게 웃는 아이들의 미소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에게도 아이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 재밌기도 했습니다. 저 때의 나의 웃음도 저리 맑고 고왔을까. 지금의 나는 어떤 미소를 짓고 있을까. 더 많이 웃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제게는 하루하루가 여행입니다. 팀원들과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
사실 조금은 진심이 섞여 있기도 합니다. 불행할 이유는 저 스스로 만들고 있더군요.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난 불행해’와 같이 내가 불행한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그 조건이 참 복잡합니다. 행복할 이유는 왜 이토록 어려운 건지. 그러나 생각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행불행을 무 자르듯 반듯하게 잘라 생각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사이 희미한 어떤 지점도 있을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순간이 소중해졌습니다. 불행이 옅어지고 더욱 선명해지는 장면들이 있었어요. 불행이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뒤섞여 다시 재조립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내 ‘불행’이 연기처럼 희미해졌습니다. 이제는 행복과 덜 행복한, 조금은 더욱더 덜 행복한 순간이 있을 뿐이지요. 뭐, 그 언젠가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더 선명한 행복을 좇아보려고 합니다.
메리 님, 부디 너른 마음으로 게으른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도 나약한 저와 편지를 주고받아 주시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메리 님의 편지를 읽고 다시 답을 쓰는 이 순간도 제게는 선명한 행복입니다. 제 아름다운 나날들 속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메리 님도 즐겁고 행복 가득한 나날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2024년 4월 17일
두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