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
메리 님께.
2024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5월이 시작되었어요. 잘 지내시는지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호수공원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메리 님은 무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이렇게 매주 편지로 먼발치에서 안부를 묻고 답하며 서로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잘 지냈습니다. 천천히 나아갔고 충분히 쉬어갔어요. 가끔 멈추어 서기도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그것 또한 잘 지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 지내는 게 별 건가 싶어요. 그냥 오늘도 무사히 아침에 눈을 뜨고 안전하게 도착한 밤에 다시 내일을 천천히 준비하는 일상도 제게는 충분합니다. 메리 님에게는 잘 지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궁금해집니다.
독서 모임의 장을 하신다니 대단하네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참여해 보고 싶군요. 메리 님의 흐름을 따라 책의 세계에 빠져볼 수 있다니 기대가 되네요.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실 텐데도 꾸준히 해오고 계시는 것을 보면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짐작해 볼 수 있군요. 저 또한 요즘은 독서에 빠졌답니다. 삶을 조금 더 진중하게 살고 싶어 나아갈 길의 힌트를 찾아 책을 탐독하고 있답니다. 그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책을 소개하고 싶네요. 정지우 작가님의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라는 책인데요. 읽으면 읽을수록 남은 페이지가 주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푹 빠져들어 읽었어요. 일부러 아껴 읽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읽었는데요. 책을 읽어야지 생각할 때는 정지우 작가님과 대화하러 간다고 생각했어요. 늘 기대가 되었지요. 작가님의 따스한 말을 또 들을 수 있다니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다 읽었어요. 그래서 더욱 아쉽네요. 또 시간이 흘러 다시 작가님과 대화를 해보려 합니다. 또 그때의 나는 작가님의 말에서 또 다른 생각들을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요.
요가 교육과정 수료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마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힘겨웠을 텐데 결국에는 무사히 완료하셨다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늘 무언가를 꾸준하게 하기를 참 힘들어합니다. 도망가기에 바빴지요. 괴로운 것, 불편한 것, 무서운 것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지요.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편해졌습니다. 눈을 감아버리면 보지 않아도 되니까 얼마나 편할까요. 그때부터 저는 멈춰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 꼭 감고 머리를 감싸 쥐고 엎드려서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모두 사라지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로 보려고 합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와라, 상대해 줄 테다.’’ 하고 외쳐봐요. 설령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더라도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면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것이 곧 내 삶을 나 스스로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원 금액이 상당한 프로젝트에 공모를 하기 위해 팀원들과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전이라면 저는 애초에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가올 수많은 변수와 괴로운 일들에 지레 겁을 먹고는 바로 도망을 쳤겠지요.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 번 해보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임했습니다. 팀원들이 있기에 더 용기를 냈습니다. 때로는 팀원들이 지치고 힘들 때 응원을 하기도 했어요. 결국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뭐, 결과는 안타깝지만, 선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보통은 이 경우 ‘실패’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게는 이 ‘실패’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저는 한 번도 실패라고 생각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나아갔던 모든 과정이 이미 모두 유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지원하겠다 마음먹은 그 시작부터 최종 제출을 하고 결과를 확인한 순간까지. 제게는 모든 순간이 다 소중했습니다. 두 눈을 뜨고 마주한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또 6월에 있을 큰 도서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공동으로 책을 만들고 있는데요. 이 또한 저는 즐겁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기쁨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과 나란히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존중하면서 또 때로는 나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는 모든 시간 가운데에서 저는 또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고 있다는 이 감각이 저를 다시 살아가게 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으로 나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내 선택에 만족하게 되며 다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동력을 얻습니다. 또 가끔 나의 말을 경청해 주는 이의 눈을 보고 있자면 나의 언어가 그리 차갑지만은 않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모든 순간에서 나의 쓸모를 찾게 됩니다.
메리 님은 무엇에 자부심이 있나요?
위 언급했던 정지우 작가님의 책에서 인상 깊었던 질문이라 메리 님에게도 여쭤보아요. 작가님은 상대의 자부심에 대해 궁금해하셨어요. 물질적인 것에 대한 물음보다도 상대의 자부심에 대한 물음을 더 하고 싶다고 하셨죠. 이 글을 읽으며 저 또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자 오랫동안 꽤 고생했습니다. 욕심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는 했지만 정말 다 내려놓았냐고 마음 깊은 곳에 물으면 아마 그렇지 못하다고 할 겁니다. 어찌 되었든 살아가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최소한의 물질은 필요하니까요. 그저 그뿐이라고 변명해 보지만 그마저도 아직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이겠지요. 그런 제게 이 질문은 아주 신선했어요. 먼저 나는 무엇에 자부심이 있을까. 찾기가 힘들더군요. 이건 그 옛날 어릴 적에 장단점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어른이 된 지금, 너 스스로 무언가에 대한 굉장한 믿음을 갖고 있거나, 혹은 타인에게 자랑할 만한 확실한 장기 같은 것을 내가 과연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싶었습니다. 사실은 이 자부심이란 것이 내가 나의 무언가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인데, 참 이것이 오히려 타인에게 인정받는 일보다도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떤 일로 괴로워하는 상대에게는 곧잘 위로를 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다가도 정작 나의 무너짐에는 속수무책이 되는 것처럼, 나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메리 님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메리 님은 어떠신지요?
최근 팟캐스트에서 해당 질문을 팀원들과 나누었을 때 저는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노력한다’는 부분입니다. 압니다. 제가 그렇게 따스하고 다정하지만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요. 그렇다고 또 아주 매몰차기만 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사내일 뿐이죠. 그렇지만 저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좋은 사람들에게 말을 예쁘게 하고 싶어요. 그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으로 나의 언어가 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저는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됩니다.
문득 보게 된 영상에서 성시경 님께서 언어 공부를 꾸준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언어를 터득하게 된 이야기를 하시면서 해주신 말씀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정말 열심히 해야 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하고 싶어야 합니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 말은 늘 제 마음속에 남았어요. 생각해 보니 지금의 제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뭐든 잘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끈기가 부족한 제가 잘하고 싶은 일만큼은 노력했더군요. 그것이 어떤 경제적 능력을 갖추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대체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 생각의 흐름,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등 노력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어른이 되고 마는 중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늘 저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스스로에게 담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고, 저는 그걸 잘하고 싶었던 겁니다. 잘하고 싶었으니까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저는 계속 노력하겠지요. 말을 예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노력하고 있고 이를 자부심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그 언젠가 스스로 담당한 사람이 되고 싶어 노력하다 보면 정말 자부심을 느끼게 될 날이 오진 않을지 믿어보고 싶습니다.
메리 님, 한 주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매 순간 우리는 나를 이끌고 나아가야 합니다. 가끔은 이런 나에게 쉼이라는 보상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끌어안고 또 어루만져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오늘은 고생한 나에게 따스한 말을 전해주는 밤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두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