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과 입춘 사이
초등학교 시절 '춘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봄 춘에 복 복. 봄에 오는 행복, 봄의 행복이라는 뜻을 가진 친구는 4월에 태어났다. 친구는 이름을 마음에 안 들어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직설적인 이름이 귀해 보인다. 춘복이의 엄마는 92년의 봄을 어떤 해보다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대한이 지나고 입춘을 앞두고 있다. 아직 겨울 추위가 한창인데 나는 혹시 봄이 이제 오나 하고 부지런히 봄의 단서를 찾는다. 잎 하나 없이 휑한 나뭇가지를 아이폰 카메라로 두 배 세 배 확대해서 찍으며 새싹이 피어날 자리가 얼마나 많을까 가늠해 본다. 오기로 한 시간은 정해져 있음을 알아서 보채지도 못하고 동동거리는 꼴이다.
사실 내가 이렇게 겨울을 힘겨워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그나마 12월까지는 괜찮았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알 수 없이 들뜬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좀 빠른 축이라 10월이 되면 이미 캐롤을 듣기 시작했다. 어느 카페보다도 빠르게 요가원에 흘러나오는 bgm을 바꾼 사람이 바로 나였다. 아무튼 12월과 1월 1일까지는 내 삶에 별 일이 없더라도 집단의 술렁거리는 감정에 기대어 설렘과 분주함이 있었던 것이다. 새해 버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지금, 떠들썩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겨울의 마지막 추위만 남았다.
매일 새벽 6시 20분쯤 요가 수련을 하러 집을 나선다. 아파트 공동현관을 나서면 듬성듬성한 가로수와 하늘, 아직 까만 하늘에 뜬 흰 달이 보이는데 나는 계절감별사라도 된 마냥 잠시 달라진 풍경을 체크하곤 한다. 주변을 둘러싼 어두움의 정도와 공기의 온도, 향 같은 것이 며칠새 조금은 달라져 있다. 여느 때보다 포근한 날이다 싶으면 괜히 요가 수련도 잘 되는 것 같다. 몸의 움직임이 기온의 영향을 받는 건 맞다.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도 추워서 작게 오그라든 어깨와 가슴을 활짝 펴내기까지 더운 날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사실이다.
추위가 힘겹다는 단순한 이유로 겨울이 어서 종료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겨울을 충실히 열심히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새벽 요가 수련을 춥다고 혹은 해가 늦게 떠서 늦잠을 잤다는 등의 이유로 빼먹은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오히려 꾸준히 조금씩 나아지는 수련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요가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겨울에는 하던 걸 그대로 지켜내기만 해도 잘한 거라고. 그래서 요즘은 하루하루 수련을 하고 그날의 수련 기록을 적으며 오늘도 참 잘했다 생각한다. 가볍게 흘리는 말이 아니라 꾹 눌러 찍은 도장처럼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준다.
나뭇가지에 걸린 것 하나 없는 겨울이더라도 일단 밖으로 나가서 걸으면 생각보다 좋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길게 뻗은 대로를 따라 걸었다. 파랗고 깨끗한 하늘에 얇은 붓으로 그린 듯 선명하고 촘촘한 나뭇가지가 도드라진다. 시야를 떨궈 바닥을 보니 잎이 없는 나무들이 빈 틈 많은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곧 우거진 계절이 오면 저 틈이 메워지는구나, 그늘이 무성해지는구나 생각했다.
긴 대로를 따라 도착한 곳은 스타벅스. 며칠 사이 같은 스타벅스에 두 번째 가서 같은 음료를 시럽의 펌프 수만 바꿔 그대로 주문했다. 별일 없는 듯 이런 일상을 반복할 테다. 사실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동동거리고 종종거리는 마음이지만 말이다. 언제 올까 기다리는 사람은 이제 온 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는 법이다. 나는 아주 일찍부터 봄을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