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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메리 Jun 14. 2021

면접장의 철학

제1. 잔인함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라고 끊임없이 강제로 되새겨지는 장소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살아왔어도 내가 가장 사랑받을만한 인생을 살아왔노라고 또랑또랑하게 말해야 하는 장소다.


옆자리에 친한 친구, 아니 엄마와 아빠가 앉는다 해도 일개 경쟁자로 느껴질 것이고 머릿속에서 오랜만에 수학적 계산을 들고 나와 지원자 숫자 대비 1에 대한 경쟁률을 시시각각 파악하려 할 것이다. 이와 대비되게 불신자건 기독교이건 불교이건 신을 향한 절박함이 가장 순수하게 묻어 나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 와있다. 이곳 분위기는 싸하게 춥다. 매번 이랬다. 긴장한 가나다라마바사들이 뿜어내는 스트레스성 호르몬이 공기 중에 분사되어 온도를 내리는 것 같았다. 이때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담당 직원이 웃으며. 안내사항을 설명하지만 누구도 웃지 않는다. 진즉에 이곳을 통과한 저 사람을 부러운 눈초리로 주시할 뿐이다. 저 직원과 같은 유니폼과 사원증을 이 가운데 단 세 명만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모두가 극도로 불안해진다.


면접장에 괴물이 있다면 불안증세를 띠는 자가 아닌, 극도로 정상인 사람이다. 나는 면접장 구석지에 앉아 꼬깃한 종이를 애써 들여다보며 발표문을 달달달 외우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밝은 톤을 연습하기도 했다. 벽시계를 스치듯 보다가 그 밑에 있는 지원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데, 근처로 가서 슬쩍 보니 소설책이다.


괴물이 나타난 거다.


안경을 쓴 이 남자는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는데 내 나이 또래 같지도 않았다. 면접을 보러 온 게 맞나 싶을 정도의 여유로움을 온몸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일본 소설책이 상당히 즐거운지 큰소리를 내며 자지러지기도 했다. 주변에 있던 지원자들이 하나둘씩 그를 의식했다.


그만의 긴장해소법이라고 여기기에는 그냥 소설에 빠진 것 같았다. 아까 직원을 바라보던 부러운 눈초리가 그에게로 향했다. 저렇게 여유가 있다는 건 분명 엄청난 내공이 있는 걸 거야. 싶은 사회초년생들이 보내오는 존경이었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잘 생각해보면 면접에 붙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존경할 필요는 없다. 평생을 알아도 모르겠는 존재인 호모 사피엔스를 짧게는 5분에서 길게는 20분 만에 파악하고 평가하고 결정하는 행위 자체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 어리석음에 동참하여 열심히 그들에게 나를 자랑하면 붙는 거고 솔직함을 숨기지 못해 스스로의 못남을 들키면 떨어지는 거다.


언젠가 대학생 때 취업성공을 하기 위한 면접 강의를 들었다. 무슨 컨설팅회사에서 자칭 면접 전문가가 나와 이것저것 팁을 알려주었다. 결론은 무조건 밝게 하라는 거였다. 스펙은 어차피 서류전형에서 거르고 2차로 면접을 보는 거니까 인상이 중요하다고 했다. 강의 끝에는 입꼬리 수술에 대해서도 살짝 알려주며 병원을 소개해주었다.


 “기메리(가명)씨 대기하세요.” 병원 URL을 받아 적는 학생들을 떠올리다가 내 이름이 불려 놀랐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짐을 챙기고 그곳을 나섰다. 직원이 앞서 가며 이러저러한 말을 해주었다. 긴장하지 않으면 된다느니 다들 착하신 분이라느니 쓸데없는 말을 했다.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웃는 얼굴로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면접관이 어찌 착할 수 있는가. 그저 이번 연도의 마지막 면접이길 바라며 조용히 뒤따라 걸었다. 직원의 발소리가 멈추고 약 2m 앞에 있는 유리문이 보였다. 문 너머로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있다. 이제 면접장의 첫째 철학인 ‘잔인함’을 견뎌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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