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턱 막힌 상태에서 작게 응축되어 새어 나오는 그 단어가 좋다. 이제는 소설을 읽기 싫다. 인생 꿀팁이 담긴 너저분한 베스트셀러도 싫다. 그냥. 시가 좋다.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어떤 것에 대한 간단한 대화도 긴장을 한다. 혹시나 내 삶이 흠칫 새어나갈까 봐 조심한다. 누구에게나 거대한 불행은 듣기 불편하니까. 그렇다고 내가 막 불행한 여자라는 건 아니다. 그저 밝게 보이는 게 가장 안전한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내 삶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시를 한 편 읊조려주고 싶다. 그 농축된 단어 하나에 내 영혼의 색깔을 눈치채 주기를 바라면서. 웃는 얼굴로 낭송할 것이다. 이 단어 하나에 검은 파도를 건너온 뗏목 같은 나의 여린 심장을 알아주기를. 이 시를 듣고, 나를 꽉 껴안아주기를.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주기를.
이제는 이런 상상만으로 위로하려 한다. 더는 누군가에게 내 진심을 보이고 싶지 않다. 부끄럽게 웃으며 '좋아해' 말해주던 그 목소리도. 따뜻하게 잠들던 그 품도. 더는 기대고 싶지 않아졌다. 어느 때엔 너로 인해 나의 검은 파도가 잠재워지면. 그땐 따스한 봄 햇살 같은 여자가 되려 했어. 살구 냄새가 나는 사랑 시를 써주고 싶었어.
요즘 빠져 있는 시 한 편 적어본다.
슬픔이란 말을 아느냐
그대가 내게 물었을 때 나는
그때 그대 뒤편의 퀭한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이미 슬픔에 함몰되어
섭섭한 채로가 아닌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먹먹한 하강이면야
하여 슬픔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악수 건네는 일
서로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일
젖은 눈길 거두는 일조차 덜 쑥스럽게
지는 낙엽의 유영하는 곡선처럼
덜 요란스럽게
팔랑거려도
슬픔에 대한 각서 - 박미경 <이별의 매뉴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