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역과 제기역 사이

시장은 시장으로 거기 있다

by 리나

오늘이 음력 12월 21일이지, 그럼 엄청 춥고 바람 불고 눈도 좀 와야 하는데 이건 너무 따뜻한 거 아닌가?

호텔을 나서며 긴 패딩을 입고 나갔다가 너무 덥지는 않을까 망설일 정도이니, 날씨가 미쳤다.


고속버스터미널역에서 3호선을 타고 가다 경의선으로 갈아타고 청량리 역에서 내렸다.

너무 많이 바뀌었다. 30년쯤 됐을까, 청량리 역 주변을 다녀본 게.

순간 당황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방향을 찾아본다.

청량리로터리를 360도 둘러보며 기억을 되살려 본다.

오른쪽이 막내 삼촌이 결혼식을 올렸던 진주 예식장, 시계반대 방향으로 그 왼쪽이 홍릉 전기 통닭, 저 쪽이 제기동 방향, 그 건너편에 성바오로 병원이 있었지.. 지금은 없어졌다지.


제기동 쪽으로 걷다 보니 호떡 튀기는 냄새와 만두 찌는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군밤과 흰 가래떡을 구워 팔던 연탄불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이맘때 시장에서 볼 수 있던 시금치, 알배기, 달래, 더덕이 보인다. 도대체 저런 물건은 어디서 구해 와서 팔고 있을까, 누가 사기나할 까하는 물건을 파는 상점이 있고, 면역력을 높인다며 일주일만 먹어보라고 열심히 설명하는 약장사도 있다. 명절을 준비하는 노년의 주부들이 두꺼운 패딩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쇼핑 카트를 끌고 몸을 부딪치며 바쁜 마음에 가슴은 앞으로 내밀고 다리를 끌며 목적지라도 있는 것처럼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나도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인 듯, '어떻게 변했을까, 알아볼 수 있을까' 설레며 긴장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두리번거리며 청량리 역을 뒤로하고 제기동 쪽으로 무리를 따라가 본다.



저쪽 기둥에 뭐라 썼는데,

"청량리 청과물 도매시장"?? 엥, 이건 뭐지??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아님 이름이 바뀐 걸까, 여기가 "경동 시장"이 분명한데 이상하다.

그러다 혼자 결론을 내려본다. 아무래도 엄마와 외할머니는 뭉퉁거려 이 언저리를 편하게 "경동 시장"이라 불렀었나 봐.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었을 수도. 그래 그럴 수 있지.

와룡동인 집 주소를 명륜동이라 불렀던 것처럼...


외할머니는 혜화동 로터리에서 버스를 타고 오시다가 제기동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딸 집에 오셨다.

우리 집에 오실 때면 경동 시장 인지 청량리 시장인지에서 한 짐 시장을 봐서 들고 오시곤 했다.

"엄마,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힘드신데" 엄마에게 핀잔을 들으시며 풀어놓으시는 할머니의 보따리 안에는 당신이 좋아하시는 도라지생채를 하시려고 사 오신 도라지와 오이, 사위가 좋아하는 과일, 피부가 안 좋은 큰 손녀를 위해 여러 번 삶아도 늘어지지 않는 옛날식 흰색 순면 팬티, 브랜드 없는 칫솔 한 묶음, 구리세린이라 부르시던 피부 보습제, 그리고 이런저런 잡다하지만 살림할 때 요긴하게 쓰일 만한 아이디어 상품 같은 게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못 들으시게 작은 목소리로 " 아휴, 할머니가 일감을 들고 오셨다. 저걸 언제 다 손질하라고."

엄마는 도라지를 보며 한숨을 푹 쉬곤 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셨는지, 할머니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시고는 양파 망을 찾아다 손수 도라지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셨다. "어멈, 손으로 하면 잘 안돼, 양파 망 안에 손을 넣고 도라지 껍질을 살살 문지르면 이렇게 잘 돼. 이게 일거리나 되나, 재미나지 뭐." 하시며 시범을 보이시곤 했다.


항상 질퍽거렸던 시장 바닥엔 아스팔트가 잘 깔려 있다. 길도 넓어지고 상호도 잘 정돈되어 찾기 쉽게 되어 있다. 큰길 좌우로 좁은 시장 골목도 남아 있어서 낯설지 않고, 지은 지 오래됐지만 옛날 기억은 남겨두고 살기 편하게 잘 고쳐놓은 집 같다.


청량리 청과물 도매시장을 통과해 걷다 보니 경동시장 간판이 보인다. 이런저런 한약재 묶음과 가루로 만들어 작은 봉지에 포장해 둔 약재, 크기와 연수가 틀린 인삼을 죽 늘어놓고 파는 가게, 건강원이라 하는 약재를 끓여 주는 곳, 거의 비슷비슷한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길가에 쭉 들어서 있다.

인삼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주인인 듯한 젊은 사람이 나에게 일어로 열심히 설명을 시작한다. 내가 아마도 관광객으로 보였던가 보다. 실망시키기 싫어서 눈으로 웃어주고 지나쳤다.


스타벅스 로고가 튀지 않게 고려 인삼 도매 상가 입구에 붙어 있다.

생뚱맞다 싶으면서도 그 옆에 붙은 "금성전파사 새로고침센터"에 더 관심이 쏠려 좁은 계단에 열을 맞춰 붙여놓은 "홍삼, 수삼, 건삼"이라 쓰인 알록달록한 스티커 위 쪽을 고개를 쭉 빼고 올려본다.


바뀐 것도 많이 있겠지, 그래도 시장은 시장이다. 안심이 된다. 시장이 그대로 있어서

상인은 힘차게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건을 팔고, 사람들은 그 거센 목소리를 조용하게 눌러가며 흥정한다.

인삼 가게 옆에 인삼 가게, 과일 가게 옆에 과일 가게, 그래도 시장 상인회에서 단체 여행도 같이 갈 거고 경조사에 쓸 곗돈도 함께 모으며 가족처럼 지낼 거다. 스타벅스가 생겼건 인터넷으로 주문을 받건 시장은 시장으로 있다. 시장 대신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아서 시장이 높은 빌딩으로 바뀌지 않아서 너무 고맙다.

그대로 있어야 할 것은 그대로 있어주면 좋겠다.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왔다가 떠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도 떠나가고, 그 일이 오랫동안 수없이 반복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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