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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Dec 13. 2023

싱가포르에 두고 떠나야 하는 친구 '집밥'

오늘 싱가포르를 떠난다.

작은 섬에서 복닥복닥 거리며 참 오래도 살았다.

떠나면 뭐가 제일 그리울 것 같냐고 남편에게 물으니 생각하기 귀찮아서인지 "Nothing" 하며 짧게 답을 한다. 표현이 애매모호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그리울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친구들이 살다가 떠났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채워 주었다. 보내는 도 맞이하는 것도 모두 익숙해진 우리들이다. 애초에 다들 무슨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왔으며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다른 이방인들과 정을 나누며 살게 되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좁은 땅에 살면서 내가 맺은 모든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듯하다.



이삿짐을 부치고 호텔에서 지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몇몇 친구들은 자기들 집에서 머물러도 되는데 왜 호텔에서 묵느냐며 진심 섭섭해했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집에 애완동물과 가정부만 남아 있을 거라며 오히려 우리가 자기들 집에 와서 지내주면 감사할 것 같다며 빈 집에서 'house sitting'을 해 달라고 신세 지기 싫어하는 우리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아는 친구들은 부탁하우리들을 빈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내 집을 내주며 '나 여행 가 있는 동안 내 집에서 편히 지내'라고 하지 못할 것 같은데,  친구들은 망설이지도 않고 우리에게 자기 집을 내주겠다고 한다. 그동안 좋은 친구들을 가까이 두고 참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다.


우리들은 '예약된 호텔을 캔슬할 수 없다'는 거짓말로 친구들의 제안을 겨우 거절하고, 우리가 살던 집 근처의 호텔에서 일주일을 묵으며 호텔과 연결된 쇼핑몰에 있는 Cafe Beviamo에서 매일 아침 진하게 내린 Long Black을 마시는 소소하지만 큰 행복을 만끽했다.


지하에 있는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올 때마다 적당한 온도로 서서히 데워지고 있는 우유의 달콤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Flat White를 한 잔씩 하곤 했던 곳이다. 나는 이 카페에서 그동안 몇 잔의 커피를 마셨을까?  카페가 생긴 지 2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맛을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하다.

이 익숙한 맛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크다.



싱가포르 탕린 몰에 위치한 Cafe Beviamo

싱가포르의 크리스마스.

찬란한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장식된 오차드 로드 (후원사 Hitachi의 로고는 해마다 더 커지는 것 같다), 루이비통과 샤넬로 쇼핑몰 앞에 세워진 트리, 눈 대신 비눗물을 뿌려대는 쇼핑몰 앞의 '가짜 눈'을 맞으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싱가포르엔 올해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잘 짜인 시나리오 같은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 2023 크리스마스


호텔에 묵는 동안 친구들이 베풀어준 만찬으로 잘 먹고 잘 지냈다.

이사하느라 탱스기빙에 터키를 못 먹었다는 말을 듣고 탱스기빙 디너를 풀코스로 준비해 대접해 준 친구, 호주에서 직접 공수해 온 양고기를 반나절 오븐에 구워서 우리 대신 친구들을 초대해서 우리의 송별회를 해 준 친구, 면을 직접 뽑아서 한국식 자장면을 만들어 준 친구, 집밥이라 누추하다며 내놓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많이 차린 인도 음식으로 우릴 기겁하게 만든 친구.

나는 친구들에게 별로 해 준 게 없는 데, 내 친구들은 나에게 진심 잘한다.



싱가포르를 떠나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 이곳의 '음식'이라고들 하는데 미식가의 천국이라는 싱가포르를 떠난 후에도 내가 배고플 때 제일 먼저 생각 날 음식은 미슐랭 가이드의 '맛집'에서 먹은 음식이 아닌 친구가 해주는 '집밥'일 것 같다. 바쁜 삶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내가 먹고 싶다는 것을 정성껏 만들어 주던 친구들의 손 맛이 많이 그리울 거다.


싱가포르 창이 공항, 크리스마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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