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이름 붙이기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을 부정한다

by 혜성

"아마도 내가 물고기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그냥 너무나 견고하게 물고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 (정지인 옮김, 윌북, 2023), 347~348쪽


2년이 흘러 다시 꺼내 읽고 있는 <자연에 이름 붙이기>입니다. 번역서가 이렇게 술술 읽히기 힘든데 참 놀랍습니다. 저자가 잘 썼고 번역자가 훌륭하게 옮겼으며 담당 편집자가 노련하게 다듬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의 협소한 아집을 안타깝게 고백합니다. 물고기를 통해서요. 그는 물고기를 좋아합니다. 조려서도 먹고 튀겨서도 먹고 구워서도 먹는 좋아하는 음식이고, 금붕어, 네온테트라, 앤젤피시는 어항 속에 넣고 키웠던 그리운 친구들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마도 내가 물고기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그냥 너무나 견고하게 물고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요. 이유라기에는 참 이상하죠? 존재하므로 좋아한다. 이 고백은 눈 앞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입속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버젓이 존재하는 물고기를 분류학의 이름으로 부정하는 과학을 다시 부정하는 선언과 같습니다.


생명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는 유서 깊은 분류의 과학이 그 질서에 착실히 따르다 어류를 제외하는 논리 앞에서 과학자 캐럴 계숙 윤은 과학자들이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더는 빠지지 말자고 말합니다.


요새 <모범택시>를 보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 또한 <자연에 이름 붙이기>처럼 나온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때지난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는데, 하나 겹치는 게 있습니다. 분명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다고 판결을 내리는 상황이지요. 죄인이 멀쩡히 눈앞에 있는데도 범죄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구속하지 못하는 상황이 <모범택시>에 나오더군요. 과학자나 법조인이나 자신이 속한 영역의 못된 규칙 앞에서 꼼짝할 수 없이 묶여 있네요.

#모범택시 #이재훈 #이솜


책을 만들면서 저는 반대의 상황에 놓입니다. 일종의 최면을 거는 건데요, 읽을 사람은 없는데 독자는 있다며 기획을 하는 거지요. 있는 걸 없다고 판결하는 것 못지않게 슬픈, 없는 걸 있다고 믿는 몸부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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