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성 Oct 30. 2021

20대 남자 대학생에게 보내는 지극히 주관적인 책 추천

그냥 내가 재밌게 읽었던 책

지난주에 독서회 총무님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 주말 간월재 축제에 아들이랑 같이 가 보고 싶다며 가는 차편이랑 올라가는 길을 어디로 택했는지 등을 물어보셨다. 얼마 전에 간월재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시기 전에 이것저것 체크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주말이 지나고 보니 그 사람 많은 곳에 무사히 다녀오셨을지 궁금했다. 아침에 전화를 드렸더니 예정대로 토요일에 근처 계곡 온천에서 쉬고 축제날인 일요일에 잘 다녀오셨다고, 힘들어서 배가 쑥 들어갔다가 이것저것 드시고 다시 원상 복귀됐다고도 하셨다.(그게 저도 그랬다니까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동행한 대학생 아들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에게 휴학 중인 아들이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 하셨다.


“어떤 책을 좋아해요?”

“최근에 베르베르 <개미>를 재밌게 읽대요.”

호~, 소설. 좀 된 건데도 재밌게 읽었단 말이지. 20대, 대학생, 남자…. 나에겐 참으로 미지의 세계다. 두렵기까지 하다. 10대, 초등학생, 남자…도 아무리 아들이어도 모르겠는데, 그보다 열 살 많은 남성이라니.

“아무래도 소설이 낫겠죠? 뭐가 좋으려나. 내가 좋아도 다들 취향이 달라서….” 시간을 벌 목적이 아니고서는 하나 마나 한 말을 뱉으며 나는 내 방 책꽂이에 꽂힌 묵은 책들을 둘러본다.


“야구 좋아하나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떠오른다. 야구 안 좋아하는 남자는 별로 없겠지, 하는 선입견에 기대 보더라도, 아, 작가의 경험이 기반인 그 시대 배경이 2000년대 생의 그것과 간극이 너무 커 보인다.

“야구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흠, 심지어 엄마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들이 야구광은 아닌 게지.

“술은 좀 하나요?”

김혼비의 <아무튼, 술>이 작아도 당차게 뽐내고 서 있다. 술 좋아하면 게임은 끝났어.

“술은 안 먹어요.”

흑, 저런, 반듯한 아이구나.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속 시원히 책 제목 하나 말 못 해 주고 다음 독서회 때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며 전화를 끊었다.     


-----------------------------


당신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해 본 말이었어도, 추천해 달라는 소리는 전화 끊기 전부터 내게 큰 짐으로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좀 많이 읽어 둘 걸 그랬구나, 이후 실행을 동반할 것 같지 않은 약한 후회도 든다. 뭐, 추천해도 안 읽을 수 있으니 그냥 내가 좋았던 것으로 하자. 기호가 다르고 취향이 달라도 통하는 맛이란 건 있잖아(라고 위로한다). 신기하게도 내용에 대한 기억 대신 읽으면서 감탄했던 기억만 있다. 꼭 읽은 지 오래되어서만은 아닌 것 같고, 덮으면 내용은 사라지고 잔향만 남는 것이 책의 속성 같다(그야말로 변명이다).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내 어린 시절 속 아빠에 대한 기억은 낮과 밤이 다르다. 아빠는 밤이면 스탠드를 켜 놓고 책을 읽으셨고, 나는 그 불빛에 밤이면 몇 번씩 잠을 깼다(설핏 본 그 책들 제목을 기억해 두었다가 조금 자라 그것들을 하나씩 읽었다). 휴일 낮 시간이면 텔레비전을 향해 누워 계시는데, 권투 아니면 씨름 아니면 야구였다. 채널권이 없던 나는 자라서도 권투와 씨름과 야구가 싫었다. 그래서였나, 이 책을 늦게 알고 읽었던 게. 늦게 안 나를 나무랐다. 한국에 대단한 소설가가 있구나. 비판의 칼과 슬픔의 차가움과 연민의 따가움이 버무려 있는 소설을 쓰는. 책을 들춰 보다 그래, 내가 다시 읽어야겠구나, 내용은 기가 막히게도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마음속이 기억하는 찌르르함이 다시 한 번 퍼지며 다짐하게 한다. 야구에 대한 호불호, 세대의 간극 때문에 그 20대 남성이 이 책을 읽다가 설마 나를 욕하지는 않을 거야.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 허지웅의 반항기가 괜히 멋있게 느껴졌던 때였다. 그래서 신간을 바로 샀다. 당시 ‘버틴다’가 일종의 사회 분위기의 한 축이 아니었나 싶다.그냥 내가 버티며 살았을 수도. 이후로 그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는데, 유독 이 노란 빛깔의 표지가 오늘 시선을 끌어당긴다. 혹시 젊은 남성의 감성 중 지금의 대학생에게도 가닿을 만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감이 있어서일까.


설흔 <우정 지속의 법칙> : 성실한 내공, 정리정돈과 섬세함과 꾸준한 공부가 있는 사람이 이야기꾼이라는 재능을 만나면 이런 작품이 완성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나왔지만 유럽에서는 청소년이 대학생까지를 포함하니, 아마 그 20대 남성도 청소년용이라고 무시하지는 않을걸.


세 작품의 작가와 작품명만 써서 문자를 보내놓고 나는 김혼비의 <아무튼, 술>을 꺼낸다. 그냥 훑어보려 꺼냈는데 작품의 제사부터 꼼꼼히 한 문장도 빠뜨리지 못하고 전체를 읽고 만다. 올해 《아무튼, 술집》을 펴낸 김혜경 작가가 이 책을 읽고 몹시 질투가 났다고 고백하며 선수를 뺏긴 기분을 토로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충분히 공감했다. 나는 작가가 아니었으니 선수를 뺏겼다는 기분이 적당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술을 향한 김혼비 작가의 ‘공개적’ 사랑 고백에는 질투를 느꼈다.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려 했다가 누가 봐도 잘난 사람에게 고백의 찬스를 빼앗긴 그런 낭패감. 게다가 술이 무술과 혼연일체가 되는 취권의 경지처럼 술이 책이 되는 그 재능이라니. 나는 몹시도 안절부절못했다. 술자리에서 술 한잔 들어간 뒤 입담 좋은 누군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술안주처럼 늘어놓는 걸 들으며, 나는 굴러가는 낙엽에 까르르 웃는 사춘기 소녀가 되어 있었다. 한 잔 술에 유머가, 한 잔 술에 눈물이, 한 잔 술에 사랑이 담기는 그 오묘한 주(酒)님의 은총이 내 온몸에 뿌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술을 못해도 이 책은 재밌어요. 총무님도 읽어 보세요~”

라는 첨언과 함께 김혼비 <아무튼, 술>도 문자로 전달한다. 나중에 총무님과, 그녀의 20대 아드님과, 내가 술 한잔하며 이 책들에 대해 얘기할 날이 올까. 상상하니 그 부조화의 조합이 꽤 재밌겠다.


그러고 보니 책장 속 묵은 책들이 주인의 무관심에 벽지 노릇밖에 못 하고 있었구나. 이제라도 하나씩 꺼내 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자의 소요유와 방송인 김종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