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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Nov 08. 2021

장자의 소요유와 방송인 김종민

방송인 김종민이 좋다. 언제부터 나왔는지 모르겠고, 어떤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브라운관에서 그의 얼굴이 보이면 거부감이 없다. 그가 뭔가 어설픈 말을 해서 게스트들이 웃으면 나도 같이 웃게 되고, 어떤 질문을 받고 두뇌 회로가 고장 난 듯 눈만 꿈벅거리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귀엽기조차 하다. 참 잘생겼다, 멋지다, 말은 못해도 한 인물 해, 얼굴은 예쁘장한데 말을 하면 좀 그래, 어쩜 저렇게 똑똑할까, 춤을 어쩜 저렇게 잘 춰, 배우가 노래까지 잘하다니, 너무 나대는 거 아냐? 등등 보통 연예인들이나 방송인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게 되는 행위가 김종민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김종민이 있다. 그래서 내가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 김종민이다.


그에게는 선량함과 함께 자신의 그릇대로 살아가려는 내려놓음의 뚝심이 있다. 그의 바보스러움은 가식적이지 않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야망 대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성실함이 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하지 않고, 튀려고 오버하지 않는다. 그의 바보스러움을 상품화하는 것이 프로그램 제작자의 계산된 의도겠으나 제작자는 그를 그들의 완벽한 꼭두각시로 쓰지도 못한다. 그걸 잘 파악해서 계산된 바보스러움을 내세울 만큼 그 자신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상품성은 식상하게 단타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제작자들, 시청자들 위에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들보다 더 대접받고 더 인정받고 더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똑같이 있을 것이다. 그 또한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모두의 무관심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여느 사람보다는 내려놓음의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닐까 싶다.


《장자》를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나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와 같았기에 줄 쳐 읽고 되새기고, 줄 쳐 읽고 돌아보다 보니 한 구절을 가지고 하루를 보내기도 빠듯했다. 읽는다기보다 새기는 작업이었고, 새길 것이 너무 벅찬 나머지 나중에는 많음을 추구하지 말고 내게 이미 들어온 구절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 장자의 뜻 아니겠냐는 타협에 이르렀다.


책을 덮고 눈을 감자 내게 남은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바로 ‘쓸모없음의 쓸모’였다. 혜자가 장자에게 크기만 컸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죽나무를 예로 들며 쓸모가 없기에 외면당하는 이치를 장자에게 가르치려 했다. 그러자 장자는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고을’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치는 자도 없을 걸세. 쓸모없다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오강남 풀이, 현암사, 1999, <소요유>편 14)라며 일침을 놓았다. 쓸모는 인간의 필요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쓸모없음이 제대로 쓰였을 때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큰 인물로 표현하는 장자의 치기 어린 허세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껏 나는 혜자로 살아왔음을 인정하고 말았으니까.


사람들은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고, 그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대학 이름을, 회사 이름을, 자격증을, 직책을, 명함을 부지런히 따 모은다. 그렇게 쓸모 있음을 수집해서 장착할수록 존재는 그 자신의 쓸모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구매당해 소비되고 버려진다. 쓸모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렇게 잔해가 되어 버릴 확률이 크다. 회사에서 능력 있는 직원이라는 사탕발림에 회사 업무에 자신의 영혼까지 갈아 넣고 결국 퇴직금 몇 푼 달랑 얻어 회사를 나올 때 왼쪽 가슴에 구멍이 난 느낌을 어디 한두 명만 가졌겠는가.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수록, 쓸모를 통해 이름을 날리기 원할수록,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보다 사회적 쓸모에 의미를 부여할수록 자기 자신은 없어질 것이다.


어쩌면 나는 김종민의 자연스러움이 진실로 자연스러움이길 바라는 아슬아슬한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친근해 보이는 이미지가 결코 그 자신 원하지 않는데 이용당하는 쓸모가 아니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최소한 살아 있는 사람 중 한 명은 자신의 규정할 수 없는 무한의 쓸모를 유한한 방송사 따위에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수 있다.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쓸모에 쓸모없이 자만하지도 말고, 쓸모없다고 쓸모없이 기죽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주인으로 각자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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