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돈된 타인의 고통을 읽는 것은 환희다.
카타르시스는 눈물로 실체를 드러내고, 눈물의 크기로 그 부피감을 드러낸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환희가 되었다고 미안해하는 것은
작가의 존재 이유를 모르고 하는 쓸데없는 배려다.
글자로 촘촘히 자신의 몸을 덮을 피부를 만들고, 그 피부가 꼭 맞게 몸을 다 덮으면
작가는 비로소 자기 몸에서 자신이 직접 짠 피부를 벗는다.
탈피한 피부는 사람의 형체를 한 채 신비한 빛과 향을 뿜으며 전시관에 걸린다.
사람들이 찾아와 그 형체를 바라본다.
누군가에게는 그 빛과 향이 꼭 자신의 것처럼 소중하다.
(누군가에게는 눈을 찌를 섬뜩함이자 토악질 나는 쓰레기 썩는 냄새다.)
작가의 몸을 벗어난 작가의 피부
그것은 이제 작가의 것이 아니다.
전시관에 온 관람객이 그것을 보고
웃든,
울든,
침을 뱉든(무심한 지나침보다 훨씬 소중하여라),
작가는 그저 맨몸이 된 순수를 덮을 다음 피부를 짤 뿐이다.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숙명이므로.
2022년 12월 15일
윤이형의 문학적 자서전 <다시 쓰는 사람>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