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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Dec 15. 2022

탈피

정돈된 타인의 고통을 읽는 것은 환희다. 

카타르시스는 눈물로 실체를 드러내고, 눈물의 크기로 그 부피감을 드러낸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환희가 되었다고 미안해하는 것은

작가의 존재 이유를 모르고 하는 쓸데없는 배려다.     


글자로 촘촘히 자신의 몸을 덮을 피부를 만들고, 그 피부가 꼭 맞게 몸을 다 덮으면

작가는 비로소 자기 몸에서 자신이 직접 짠 피부를 벗는다.

탈피한 피부는 사람의 형체를 한 채 신비한 빛과 향을 뿜으며 전시관에 걸린다.

사람들이 찾아와 그 형체를 바라본다. 

누군가에게는 그 빛과 향이 꼭 자신의 것처럼 소중하다.

(누군가에게는 눈을 찌를 섬뜩함이자 토악질 나는 쓰레기 썩는 냄새다.)     


작가의 몸을 벗어난 작가의 피부

그것은 이제 작가의 것이 아니다.

전시관에 온 관람객이 그것을 보고 

웃든, 

울든, 

침을 뱉든(무심한 지나침보다 훨씬 소중하여라), 

작가는 그저 맨몸이 된 순수를 덮을 다음 피부를 짤 뿐이다.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숙명이므로.               


2022년 12월 15일

윤이형의 문학적 자서전 <다시 쓰는 사람>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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