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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Dec 14. 2021

열 살의 특별한 휴가

“와, 진짜 배부르다.”

국수집을 나오면서 봉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러서 아픈 배를 차가운 공기에 호소했다. 수술을 마치고 2주간의 회복기를 병원으로부터 명받은 아들 봉이는 수술의 아픔과 불편함 따위는 학교와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되는 공인된 자유에 완전히 잊은 듯했다. 일주일간 하루 두 번 복용해야 하는 항생제와 진통제를 먹을 때는, “약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웠어요.”라며 패러디 유머를 할 만큼 여유가 있었다. 물 한 모금에 알약 1정이 아니라, 2정을 한꺼번에 한 모금 물로 삼키는 레벨업은 엊그제 이뤘다.


수술을 앞둔 일주일 전부터 봉이의 자기 전 중요 업무는 ‘어떤 맛있는 것’을 먹을까 진지하게 찾는 거였다. 초밥 뷔페와 고소한 삼겹살 구이, 달큰한 갈비구이는 이미 수술 전에 희망 목록에서 차근차근 지워 나갔고, 수술하고서는 수술 당일 전복삼계죽과 단팥죽을 시작으로 목살 구이, 숯불 닭발, 쌀국수, 칼국수, 닭갈비 등을 하루 하나씩 먹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학교에 가지 않아 행복한데, 먹기 싫은 급식 대신 희망 메뉴로 점심 식탁이 차려지는 열 살 봉이의 이번 주는 천국으로의 여행임에 분명하다. 마음이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해서인지 수술 상처도 잘 아무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 눈이 충혈되는 증세가 간헐적으로 있었고, 세상모르고 늦잠 자는 주말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또 괜찮아져서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병원에 가지 않고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올가을 충혈 상태가 예전과 달리 심각해 보여 안과에 갔더니 아래 속눈썹이 각막을 찌르고 있단다. 의사는 각막의 3분의 1이 혼탁한 상태라며 대학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 보길 권했다. 진료 소견서를 받아 들고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했고, 담당 의사는 각막을 향해 반듯하게 위로 자라는 속눈썹 방향을 찌르지 않게 바꾸는 절개 수술을 권했다. 세상엔 참 모르는 병이 많다. 날 닮지 않고 까맣고 두껍고 숱 많은 봉이의 머리카락과 눈썹을 보며 참 다행이고 부럽다, 했는데 그 부러웠던 눈썹이 글쎄 민감한 각막을 찌르는 조용한 흉기였다니…. 아픔을 견디기 힘든 나이라 수술을 위해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점이 가장 걱정스러웠다.


수술 날짜를 잡고 나니 어서 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마취와 아픔을 상상해야 하는 봉이는 매일 두려움에 시달렸다. 눈썹 하나의 의심조차 없이 잘될 거라 믿은 나는 그런 봉이에게 걱정도 말라고, 해야 할 숙제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수술 당일이 되었다. 나이 어린 순으로 수술 순서가 잡히는데, 봉이는 두 번째였다. 8시에 병원에 도착해 병실에 들어가니 바로 옆 침대 아래로 자그마한 검은색 운동화가 보였다. 아마도 오늘의 가장 어린 수술 환자겠구나, 벌써 도착해 수술을 하나 보다, 싶었다. 봉이는 간호사 선생님이 안내해 주는 대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항생제 알레르기 테스트도 하고, 링거 주사도 혈관을 찾아 꽂은 후 누웠다. 환자복을 입고 있으니 실감이 났다. 지금까지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수술을 기다리는 이 시간은 침이 말랐다.


드디어 수술실에 들어간다는 연락이 왔다. 보호자 한 분은 수술실에 따라 들어가 마취가 되는 것까지 보고 나온다고 해서 내가 그 보호자가 되었다. 봉이와 계속 눈을 맞추며 침대 한쪽을 밀고 복도를 걸었다. 수술실 앞에서 대기를 하는 동안 내가 봉이에게 말했다. “태봉아, 네 덕분에 엄마 수술실까지 들어가 보고 정말 영광이야. 이런 건 드라마에서나 봤는데, 고마워.” 다행히 봉이가 어이없어하며 웃는다. 함께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할수록 가슴을 쓸어내린다. 열 살 아이가 덩그러니 혼자 수술실에 들어가는 기분은 어떨지. 얼마나 무섭고 떨릴까. 큰 수술이든 작은 수술이든 들어가는 아이가 알 게 무언가. 정신을 잃고 내 몸에 칼을 댄다는 사실은 심장을 떨리게 한다. 딱 두 번의 호흡 끝에 봉이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들어갈 때와 달리 어머니는 어서 나가시라는 채근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든 아이에게 이따 만나자 말하고 나왔다.


마취가 깨어나 온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걸 확인하고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피가 묻어 있고 퉁퉁 부은 봉이 눈을 바라보니 짠했다. 수술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 삶이 있다면 참으로 복이겠다, 자식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진짜 큰 복이겠다 싶었다. 엄마가 딸의 출산에 가슴 아파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심지어 아이 낳는 고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봉이가 잘 깨어나 배고프다 해 주니 감사했다. 집에 돌아온 봉이는 포장해 온 전복삼계죽을 먹으면서도 내일은 뭘 먹을지, 모레는 뭘 먹을지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매일을 조마조마하며 기다렸던 수술이 끝나니 봉이도 시원한 것이다. 아직 수술 부위 상태가 성공적인지 알 수 없지만 나 또한 오늘이 무사히 지나간 것이 꿈만 같았다. 함께 시킨 곤드레 전복영양밥을 나도 싹싹 비웠다. 숟가락을 부지런히 입속에 넣으면서도 눈은 계속 봉이의 눈에 가 있다. 예뻐질 거다, 괜찮을 거다, 안 아플 거다, 잘 아물 거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넣느라 바빴다.


“엄마, 학교에 있는 동안은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학교를 안 가니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

너무도 빨리 가는 특별한 휴가를 보내는 봉이 옆에서 나의 하루도 빠르게 지나간다. 알람이 울리면 연고를 발라 줘야 하고, 약도 챙겨 줘야 한다. 알람 소리보다 더 자주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녀석의 배를 무엇으로라도 채워 줘야 한다. 심심해하니 놀아도 줘야 하는데, 원하는 놀이의 수준이 여섯 살 아이 때와 달라 서로 곤혹스럽다. 물릴 만큼 맛집 검색을 같이 해야 한다. 계속 붙어는 있는데 계속 심심하다. 그래도 엄마랑 대화가 안 통해 곁을 주지 않으려는 나이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지 싶다. 다시 학교를 가게 되면 시원할까? 사실 그리 안 중요하다. 그저 올해의 이 경험이 무탈함으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모두가 오늘보다 더 건강한 내일을 맞이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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