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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an 14. 2022

소공녀의 15년산 글렌피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

“난 민지 씨가 좋아하는 일 하니까 기뻐요.”


밤일을 나가는 민지의 집에 화목토 저녁 7시에 와서 일당 4만 5천 원짜리 가사 도우미 일을 고정으로 하던 미소는 어느 날 청소를 하러 집에 들어섰다가 늘 없던 민지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민지는 아이 아빠가 누군지 모르겠는 임신을 했다며, 그 오빠들한테 다 연락해서 돈을 받아내 그 돈으로 네일숍을 차릴 거라고 반쯤 실성한 듯 미소에게 말한다. 자기는 손 만지는 게 좋다면서 자기가 직접 꾸민 자기 손톱을 미소에게 내밀어 보여 준다. 미소가 미소를 지으며 예쁘다고 다정하게 웃자 민지는 못 견디고 소리를 친다. “언니,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줘요? 나 이제 집 없어요. 언니 이제 잘렸다고요.” 미소는 알고 있다. 보증금이 없어 트렁크에 자기 전 짐을 싣고 매일 이 집 저 집 하룻밤을 의탁하는 자신의 신세를. 그래서 민지의 임신 소식은 민지만큼이나 자신에게도 큰 타격임을. 하지만 미소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은 민지의 미래를 응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 밥 먹을래요? 뭐 당기는 거 없어요?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해요.” 토하듯 “백숙”이라고 말하며 울음을 꺾는 민지 앞에 어느새 뽀얀 백숙 한 상이 차려져 있다.


영화 <소공녀>(감독 전고운, 2018년 개봉)의 주인공 미소(배우 이솜)는 부모가 없어 방 한 칸이라도 물려받을 것이 없었고, 대학을 갔으나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중퇴했다. 프리랜서 가사 도우미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을 자처하지만 빚지며 사는 걸 싫어해서 일급 4만 5천 원 수입을 지출할 항목별로 알뜰하게 쪼개 돈통에 분류해서 넣어 둔다. 밥값, 세금, 약값, 집(월세)세, 위스키, 담배. 월세를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 수도세와 전기세 등을 꼬박꼬박 냈다. 어떤 것에도 빚지지 않는 인생,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은 포기하지 않는 인생. 그것이 이 지구상에 혼자밖에 없는 미소가 삶을 사는 방식이었다. 아, 그에게도 동지가 있다. 담배, 위스키, 그리고 그의 유일한 안식처인 남자 친구 한솔이(배우 안재홍).


한솔과 미소는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미소의 방에서 손바닥 뒤집기 게임을 한다. 맞아서 벌게진 건지 추워서 벌게진 건지 알 수 없이 손등이 벌게지게 게임을 하다가 둘은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 너무 오래 안 했다는 깨달음이 오고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한다. 가진 옷 전부가 온몸에 걸쳐진 듯 껴입은 옷들을 한참 벗다가 속옷바람이 되었을 때, 둘은 안으려고 다가갔다가 서로의 차가운 몸에 깜짝 놀라 물러선다. 생각보다 추운 걸 깨닫고 잠시 고민하다 말한다. “봄에 하자.” 둘은 시린 세상, 살이 닿아도 오히려 차가운 세계를 의지하는 유일한 안식처로 서로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둘에게도 시련이 닥친다.


10, 9, 8, 7, 6, 5, 4, 3, 2, 1, 와! 2014년과 2015년을 구분하는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환희의 폭죽과 함께 미소에게 건네진 것은 2천 원 오른 편의점 담뱃값이었다. 4천 5백 원의 에세. 4만 5천 원의 예산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아슬아슬한 하루에서 2천 원은 너무 큰 변수다. 그러나 편의점 직원은 4천 원짜리 담배가 있음을 친절하게 알려 주며 디스를 내민다. 이제 얇고 긴 에세의 낭만도 2014년과 함께 떠나보내야만 한다. 디스여도 4천 원이나 하는 담뱃갑을 들고 미소는 나온다. 밥 1만 원, 세금 5천 원, 약값 1만 원, 집(월세) 1만 원, 위스키 1만 2천 원, 담배 4천 원. 4만 5천원 일급에서 이들을 제하니 6천 원이 모자란다. 약을 포기할 수 없다. 먹지 않으면 백발이 되고 마니까. 밥을 굶을 수도 세금을 안 낼 수도 없다. 미소는 고민한다. 집(월세) 1만 원을 내지 않으면…? 무려 4천 원이나 남는다. 다음 달부터 월세를 5만 원 올리겠다는 집주인에게 미소는 지금까지의 집세를 봉투에 담아 건넨 뒤 트렁크를 끌고 나온다. 그리고 대학 때 활동했던 밴드 크루즈의 멤버 다섯 명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 한 사람씩 찾아간다. 자신이 그때 자기 방에 조건 없이 들였던 그 마음 그대로 친구들도 그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큰 회사에 다니는 문영은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한다. 시댁에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집이 아닌 가정부처럼 사는 현정은 자신의 친구를 들일 정치력이 없다. 아내가 떠나고 없는 빈집을 지키는 대용은 자신의 안방을 미소에게 내주었지만, 남자사람이어도 남자와 한집에서 사는 것이 싫은 한솔이를 위해 미소는 그 집을 나온다. 오직 남은 생의 목표라고는 결혼밖에 없는 록이의 집은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미소를 가둔, 탈출해야 할 감옥과 같았다. 부잣집으로 시집간 정미 언니는 집이 넓어 손님으로 마음 편히 있으라 한다. 미소는 정미네 지붕 아래 기거하며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4천 원 디스와 1만 2천 원 글렌피딕을 유지하며 월세 보증금을 차곡차곡 저축해 나간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느끼며.


그러나 바로 그 문제의 신호는 정체를 드러냈다. 남의 집에 얹혀 있으면서도 담배와 위스키를 끊지 못하는 미소에게 정미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한다. “언니도 알잖아. 내가 담배와 술 사랑하는 거.”라는 미소에게 정미는 “그 사랑 참 염치없다, 야.”라고 못 박는다. 그러면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놓는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그러나 미소는 외면하고 정미의 집을 나선다. 최악의 상황에서 유일한 안식처 중 하나인 한솔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발령을 신청했고, 2년간 5천만 원을 모아 학자금 대출 갚고 미소와 함께 살 집을 구한다는 계획을 말한다. 미소는 먹던 오뎅 꼬치를 집어 던지며 말한다. “배신자.”


집을 찾아다니는 일종의 크루즈 여행에서 미소가 마음만 먹으면 집이라는 안정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유혹이 있었다. 집 안 흡연과 남자친구까지 허용하는 록이의 결혼 제안이 있었고, 술과 담배를 끊고 조금 더 악착같이 사는 염치 있는 평범한 모습을 보이면 그 기간을 더 연장할 수 있는 정미네 집이 있었다. 2년을 사막에서 일하며 5천만 원이라는 ‘우리의’ 집 종자돈을 마련하겠다는 한솔의 계획에 현실의 계산기를 두드려 환호하고 격려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온 국민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2천 원 오른 담뱃값이나 날이 갈수록 오르는 가겟세 부담에 한 잔에 2천 원을 더 받는 위스키값처럼 미래를 담보로 한 남자친구의 당장의 부재는 미소에게 그저 배신일 뿐이었다.


미소는 자신에게 현재 소중한 것을 정확히 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안다. 담배 한 갑과 45ml 글렌피딕 15년산 한 잔. 그것은 미소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이다. 그런 자신을 이해하는 남자친구까지 세 가지가 있다면 미소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 그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이기적이지 않다. 자신처럼 남들의 선택과 삶도 존중한다. 가식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다면서 “내가 이렇게 헤퍼요.”라는 민지에게 “헤픈 게 어때서요.”라고 미소는 진심으로 대꾸한다. 아내를 위해 매달 원리금 100만 원을 20년간 상환해야 하는 아파트를 분양 받고도 정작 아내는 떠나고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한 대용을 문밖으로 꺼내오기 위해, 미소는 헌혈을 하고 받은 초코파이 봉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우눈 대용을 안고 토닥인다. 남자사람이어도 여자 친구가 남자와 한 집에서 기거하도록 만든 자신의 무능을 한솔이 탓하자, 미소는 과감히 대용의 안방을 버리고 나온다. 당장 머물 곳이 없어도 한솔이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웹툰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고 5천만 원을 모으기 위해 사우디 사막을 선택한 한솔에게 미소가 선물한 것은 그곳 생활을 웹툰으로 그리면 재밌을 것 같다며 준비한 노트이다. 한솔의 대답이 비록 “헛된 희망이야.”여도 말이다. 미소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소중한 오늘과 한솔의 헛된 꿈과 타인의 모든 선택을.


살아오면서 나를 나이게 한,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머지 것들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오로지 그것 하나는 지켜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내가 지금껏 해 온 수많은 후회와 변명과 타협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나에게 미소처럼 담배, 위스키, 한솔이라는 구체적인 무언가는 없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미소에게 담배와 위스키와 한솔이라는 취향이 없었어도 미소는 분명 미소로 살아갈 것임을. 그것이 남들 눈에는 기이하고 염치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한 사람의 삶을 비루하게 만들지 않는 기둥임을.


나는, 내 수많은 선택은 그것이 비록 타협과 맞잡은 손이었을지라도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이었음을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내 방식대로 때론 헤프게(민지), 때론 현실의 이익을 좇아(문영), 때론 절망하며(대용), 때론 울타리 없는 허용과 단절로(록이), 때론 다른 이의 선택을 염치없게 생각하며(정미) 그렇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소의 절대 명제인 소중한 오늘과 소중한 자신의 취향을 보며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마음의 빚도 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누구를 비웃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자신의 위스키 잔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미소를 보며 깨닫는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미소의 담배와 위스키는 책과 노트북임을. 읽고 쓰는 삶. 그것이 나의 작은 세계를, 하루하루를 따뜻이 빛나게 할 반딧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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