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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Apr 05. 2022

감칠맛

카톡방에 작업실 주소를 남기고 나는 시원 씨를 태워 출발했다. 먼저 도착해 나중에 올 요가 샘에게 주차 자리를 안내할 요량이었다. 벚꽃도 흐드러지고 작업실 잠깐 구경한 뒤 근처에서 셋이 점심이나 하려 했는데, 요가 샘이 월수금은 커피숍 하는 언니 도우러 간단다. 

“샘은 일찍 가야 한다니, 자기는 나랑 점심 먹자.”

“점심요…? 선생님 갈 때 일어나야지.”

“왜? 어디 가?”

“애 오기 전에 간식 차려줘야지….”

웬일인지 태도가 분명한 시원 씨답지 않게 말끝이 흐리다. 

“둘째 땜에 속상해서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싶은 맘…, 알죠?”

“애들은 잘하겠지, 그냥 자기 눈에 안 차서 그런 거 아냐? 애들 다 잘한다. 좀 기다려봐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내가 이 작업실을 왜 차렸게. 

대학원 졸업 전에 선을 보고 졸업식도 못 가고 결혼해서 스물여덟에 첫애를 가졌다. 남편 뒷바라지에 애들 키우는 게 삶의 전부로 15년을 살았다. 순진한 애들 100원으로 꼬셔서 영어 원서도 읽게 하고, 첫애 중학교 입학하고서는 내 발로 학교 찾아가 학교운영위원회 위원도 자원했다. 밖에서나 허울 좋은 의사 사모님이지, 집에선 돈 한 푼 못 버는 무능한 아내이자 자존심 하나 없는 엄마였다. 내 엄마가 그러했듯, 내 입으로 들어갈 음식은 안 챙겨도 애들 간식 목구멍에 넘어가는 것까지 다 보고서야 편안히 숨 쉴 수 있었다. 나는 신문 한 자 안 읽어도 애들은 책 한 권 더 읽히고 독후감 한 편 더 쓰게 하려고 안 해본 짓이 없다. 애지중지 귀하게 키우고 애걸복걸 매달려서 명문대 입학증을 남편에게 시댁 식구들에게 보란 듯이 내밀려 했다. 

그런데 딱 15년이었다. 15살이 된 첫애가 더는 엄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학교에 가지 않더니 시쳇말로 오토바이 타는 거 빼고 할 거 다 했다. 곱게 키운 당신 딸이 겨우 이런 꼴이라는 걸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확인해 주려는 듯이, 그렇게 엄마의 울타리를 넘어 날뛰었다. 남편의 권유로 정신과를 찾아갔다. 얘기를 들은 의사가 말했다. 

“아이들 보는 거 그만하세요. 아이들은 자식바라기 엄마 싫어해요. 어머님 당신 삶을 사세요.” 

내 삶을 살라? 지금까지의 삶은 뭐고? 다른 내 삶이 있다고…? 

한참을 방황했다. 내 삶을 어떻게 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남편에게 의사의 말을 전했다. 

“당신 전공을 살리면 되잖아. 당신 도예가 아니야.” 

벽에 막힌 내 삶의 골목길을 함께 걷던 남편이 벽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쾅쾅 두드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아!” 

그제야 떠올랐다. 도자기를 굽던 내 20대를. 먼지 뿌연 작업실에서 졸업 작품을 만들지 않았던가. 나는 월 15만 원짜리 작업실을 빌렸다. 작업대로 쓸 큰 책상을 짜고 굽는 기계를 들였다. 남편 출근하면 집을 나와 퇴근 무렵 들어갔다. 그렇게 돈만 들어가는 5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내 도자기 꽃병을 보고는 다섯 사람이 작업실에 찾아와 꽃병 하나씩을 사 갔다. 

“기운 내. 나 지난 금요일에 20만 원이나 벌었어. 맛있는 거 사줄게. 점심 먹고 들어가자.”

인심 써서 숯불고기 세트로 밀면을 시켜줬더니, 시원 씨는 “진짜 맛있어요, 언니.”를 연발하며 그릇에 코를 박고 먹는다. 그 모습이 딸아이 같아서 예뻐 보였다. 돈 버는 맛이 이런 거군. 이번에 홍보 엽서도 만들고 제대로 신제품 출시하면 시원 씨 좋아하는 맥주까지 곁들일 테다. 

흥, 내 삶이라는 거 별거 아니구먼. 아니다. 실은 별거 중에 별거다. 입에 짝짝 달라붙는 감칠맛이 최고다. 밀면에 고기 한 점을 얹어 입에 넣고 벚꽃 비가 나리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자꾸만 목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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