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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Apr 18. 2022

세영의 소리

유난히도 오후 하늘이 파란 날이다. 출근한 지 일주일 된 세영이 고객의 질문에 당황하며 “죄송합니다. 고객님.”을 말할 때마다 진섭은 파란 하늘을 눈에 담았다. 사무실 창문이 진섭의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 앉은 세영의 자리 뒤를 차지한다는 걸 이곳에 출근한 지 1년 만에 깨달았다. 세영의 죄송합니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진섭은 고개를 들었고, 시선은 세영 정수리 위를 타고 넘어 창에 두었다. 일주일 중 오늘이 가장 맑아 보였다.


한 달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 세영은 신입치고 잘 버티는 편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신화보험입니….” 첫 문장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툭 끊기는 전화에도 며칠 만에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바빠 죽겠는데 어디서 전화질이냐” 따위의 언성에는 여전히 미간에 주름이 진다. 감정 보따리는 집에 두고 출근하라는 말은 교육받는 내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겠지만, 감정의 송장들도 밟으면 꿈틀댄다. 꿈틀거림은 마스크 밖으로도 스멀스멀 삐져나온다.


파란 하늘이 회색의 침입자를 들이는 장면을 목격한 건 세영의 안녕하세요도, 죄송합니다도 아닌 섬뜩한 무음이 진섭의 귀를 채울 때였다. 진섭대로 고객 응대를 하면서도 세영의 목소리는 진섭의 세 번째 귀가 듣고 있었다. 하지만 상품을 설명하다가 5초 넘게 이어지는 세영의 정적의 목소리는 진섭의 세 번째 귀를 차갑게 때렸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스티로폼 상자에서 꺼내다가 미처 떼어내지 못한 드라이아이스에 손가락이 닿은 것처럼 느껴지는 뜨거운 차가움. 앗, 뜨거!


진섭은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고, 세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목소리만이 아니라 세영의 온몸이 소리를 거부했다. 어떤 소리도 듣지 않겠노라, 어떤 소리도 내지 않겠노라 비장하게 외치는 무음의 소리를 진섭의 세 번째 귀는 똑똑히 들었다. 세영을 뒤에서 호위하는 창문을 시커먼 먹구름이 삼켰다. 진섭은 그대로 먹구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빠르게 전진하는 먹구름과 달리 세영은 천천히 이어폰마이크를 벗는다. 그걸 조용히 책상에 올려두고 진섭 앞을 지나 출입문 쪽으로 사박사박 걷는다. 유리문이 끼익 열리고 쿵 닫힐 때까지 진섭의 세 번째 귀는 열려 있다. 분명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1층’이라는 기계음이 났다. 여전히 창에 시선을 고정한 진섭의 눈에 축축함이 들어온다. 소나기.


통화를 마친 진섭은 빠르게 이어폰마이크를 벗고 서랍 속 우산을 꺼내 유리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를 호출한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자마자 진섭은 로비 현관으로 뛴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에 거리는 무지갯빛을 뿜으며 우왕좌왕이다. 버스정류장 유리 박스 안으로 몇몇이 빠르게 뛰어든다. 예보에도 없던 비를 귀신같이 알고 우산을 준비한 남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두 발을 차례로 여유롭게 내뱉는다. 외투는 이럴 때 쓰는 거라며 남자가 여자와 자신의 머리 위로 외투를 펼쳐서 날개 안에 두 몸을 우아하게 숨기고 걷는다. 그 뒤를 따라 한 무리를 이룬 서넛의 동행인이 각자 외투 깃을 정수리까지 올리고 목 주위에서 외투를 그러쥔 뒤 코만 밖으로 빼고 성큼성큼 내딛는다.


그들 사이를 헤치며 진섭은 세영을 찾는다. 어디 있는가. 첫 출근하던 날 “잘 부탁드립니다.” 말하는 세영의 목소리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었다. 저 목소리가 1년 전 나의 목소리였나, 문득 진섭은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파란 목소리는 색을 잃었다. 소리를 잃었다. 시커먼 물에 잠기기 전에 찾아야 한다.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띠리리 띠리리 길을 건너도 된다는 안내음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움직인다. 우산을 쓰지 않고, 옷깃을 올리지 않고, 종종거리지 않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비를 신경 쓰지 않는 한 사람. 세영이었다. 진섭이 뛴다. 무슨 소리를 내야 세영이 돌아볼지 모른다. 무작정 뛴다. 맞은편 인도에 다다른 세영 앞에 진섭이 선다. 세영의 눈은 초점 없이 걷는다. 진섭의 눈이 세영을 부른다. 세영의 눈은 계속 걷는다. 진섭의 눈이 부른다. 끈질기게 소리친다. 들은 걸까. 세영의 눈이 천천히 진섭의 소리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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