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성 Jul 24. 2023

옴 샨티샨티샨티

평화를 찾아가는 매일 한 줄의 수련

지혜는 마음보다 강하다.

고요는 지혜를 실천하게 한다.     


오전 요가에서 저녁 요가로 수업 시간을 바꾼 지 1년이 다 되었다. 시간을 바꾼다는 건 선생님도 바뀐다는 뜻이었고, 익숙한 패턴의 동작과 강조점에 새로이 적응해야 한다는 걸 바꾸고 나서 알게 되었다. 오전 요가 선생님은 하루를 시작할 활기와 씩씩함을 주었다면, 저녁 요가 선생님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원함을 선사했다.

몇 달이 지나 이제 좀 적응이 되려나 했을 때 선생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신다고 통보했다. 다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구나. 자발적 변화가 아니라 수동적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 하나 더 추가된다는 데에 화를 낼 힘조차 사라졌다. 당시에 나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감당하기 벅찬 일들에 시달리고 있어서 마음에 분노가 부풀어 있었다.     


새로 오신 요가 선생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전 두 선생님은 서로 다른 개성이 있었지만, 두 분 모두 젊었고 근력 운동을 중요시해서 헬스트레이닝의 요소를 접목했었다. 요가가 너무 정적이고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을 깨고 스트레칭과 가볍게 땀을 낼 수 있는 운동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새로운 선생님 수업에 참여하고 나니 이전 선생님들과 함께한 요가는 캐주얼요가였구나, 알게 되었다.     


가장 낯설게 다가온 부분이 그분이 사용하는 요가용어였다.

예를 들어, 자주 하는 자세를 칭하는 ‘코브라’와 ‘다운독(Down Dog)’ 대신 ‘부장가’와 ‘아도 무카 스바나’를 사용했고, 무엇보다 ‘자세’가 아닌 ‘아사나’라고 칭했다. 모든 자세를 요가용어로 칭하니 처음에는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몰라서 선생님을 쳐다보거나 주위 사람을 따라 하려다 집중이 안 되었다.

‘천천히’와 ‘자기에 맞게’라는 부사어가 계속 들렸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운동’이 아닌 ‘수련’이라고 칭했다. 당신이 십몇 년을 엉망인 몸에서 지금의 몸으로 만들어내었다는 강조를 반복했고, 지금은 안 되어도 ‘언젠가는’ 된다고 끊임없이 얘기했다.

동작을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대신 그 이외의 말이 많고, 그만큼 동작의 개수가 몇 개 없고 단순해서 첫 한 달은 억지로 다녔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두 달이 넘고 석 달째로 넘어가면서 요가 수업이 주는 에너지가 그전과 사뭇 달라졌음을 느꼈다. 외계어처럼 느껴졌던 요가용어가 여전히 헷갈리기는 했지만 동작을 이어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된다’, ‘힘이 생긴다’, ‘좋아질 거다’라는 주술 같은 말이 그분이 자주 사용하는 ‘스며든다’ 그대로 내 머리와 마음에 스며들었다. 이미 되고 있고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어떤 자세를 해도 안 되는 날조차도 ‘오늘은 안 되지만, 다음엔 되겠지’라고 여유 있게 생각되었다.

50분 동안 몇 개 안 되는 동작을 천천히 그리고 반복하게 함으로써 단조롭게 느껴졌던 수업이, 이제는 몇 개의 동작에 최대한 집중해서 그 동작이 몸에 주는 힘의 효과를 느끼는 수업으로 변화했다. 단순함과 반복에서 오는 집중력과 그로 인해 몸과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은 상쾌하고 시원했다.     


 놀라운 건 다른 데 있었다. 처음에는 요가 동작에 대한 설명 이외에 너무 장황하게 느껴졌던 당신 이야기들이 오히려 즐거운 얘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볼까.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선생님이 지금껏 요가를 해온 철학과 자세를 얘기할 때 나는 그것을 내 몸의 세포에 흡수되도록 호흡한다. 어떤 것도 거저 되는 것이 없고, 꾸준히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게 지금 내게 꼭 필요한 말로 느껴졌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을 해놓고 내가 쓴 크고작은 글들이 형편없게 느껴져서 요즘 많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했으니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는데, 내 마음이 급했나 보다. 그래서 마음이 괴롭다는 핑계로 시간을 허비하며 노트북을 멀리했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처럼 지금 내게 적절한 말이 또 있을까. 그런데 있다! 세트로 따라 오는 말이다.

“힘을 내지만 억지로 하지 않는다.” 정말 멋진 말이다. 자세를 잘하고 싶어서 힘을 내는데 그것이 과할 때, 지나친 욕심으로 점철될 때 몸에 탈을 일으키고 만다는 뜻이다. 내가 왜 내 글에서 형편없음을 발견했을까. 그건 잘하고 싶다는 생각에 힘을 내다가 글에 여유를 잃었기 때문이었다고 자평한다. 잘하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즐거움을 위한 글쓰기를, 글이 가져야 할 여백을, 글이 전해야 할 바람을 막았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요가를 하기 위해서 요가 수업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요가 선생님의 요가하는 마음가짐을 배우러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은 요즘에 선생님이 활동한다는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엔 예쁜 자세를 담은 사진이 많이 있었지만, 역시나 내 마음속에 들어온 건 그 밑으로 올린 당신의 이야기였다. 그곳에서도 수업 때처럼 주옥같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 하나를 오늘의 말로 담아 본다. 그걸 내 마음에 고이 간직하기 위해 글로 남긴다. 그 말을 왜 썼는지를 설명하다 보니 이렇게 글이 되었다.      


지혜는 마음보다 강하다.
고요는 지혜를 실천하게 한다.


글귀를 처음 접했을 때, 머리를 손으로 한 대 딱 치는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그런데 다시 읽고 또 읽고 지금 이렇게 쓰면서 다시 읽는데 잘 모르겠다. 알 것 같은데 모르겠다. 마음은 뭐고 마음보다 강한 지혜가 뭔지. 고요가 어떻게 지혜를 실천하게 한다는 건지. 고요는 또 어떻게 획득하는 것인지.

이런 질문에 답을 구하러 다른 게시물의 메시지를 찾아 읽었다. 한 게시물에 이런 말이 나온다.     


무의식적인 자연스러움을 얻을 때까지
굉장히 의식적으로 몸을 가르쳐야 한다.     


즉, 몸수련만이 답이라는 뜻이다. 굉장히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무의식적인 자연스러움이 생긴다는 것. 고요 또한 마찬가지겠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헛된 공상을 몰아내는 건 묵묵하게 글을 쓰는 의식적인 행위일 뿐.      


오늘 나는 결심을 한다.

하루 한 줄이라도 쓰자.

꾸준히 천천히. 억지스럽지 않은 힘을 내서.

나와의 약속은 자꾸 어기게 되어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결심을 올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벚꽃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