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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ul 25. 2023

위대한 멈춤

전환의 귀착점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

2년여 전, 20년 가까웠던 직장인의 삶을 멈추고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왔다. 늘 꿈꿨던 결정이었다. 직장인이라면 늘 안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사표를 현실에서 꺼냈고, 물리적인 환경까지 바꿔 일상을 여행처럼 보낼 자유까지 손에 넣었다.

몸도 정신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여서 회복이 필요했다. 멈춤 다음을 계획할 힘도 없었지만, 업무를 하면서 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계획과 실행을 과식했다. 노 계획! 그게 내 멈춤의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처음 한 달은 힘이 솟았다. 여행지에 무사히 도착하고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만드는 바로 그 힘과 비슷했다. 한 달이 지나고 낯선 곳이 점점 익숙한 삶의 동네가 되자, 그 익숙함이 무서워서 집 밖에 잘 안 나갔다. 나는 내가 행한 선택이 무모한 일탈로 끝날까 봐 겁났었다.

집에 있으며 틈나는 대로 잤다. 새벽에 악몽에 눈을 뜨면 방 안에 갇힌 느낌이 들어서 괴로움에 동이 트길 기다렸다. 다섯 시가 되면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숲 속 나무들이 매일 팔을 뻗고 짙어지고 혹은 쳐지고 색이 달라지는 변화를 눈으로 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아이들이 회사와 학교로, 각자의 사회적 위치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침대에 누웠다. 지금까지 못 잤던 잠을 한꺼번에 잔다는 건 표면적 이유였다.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린 현실에 눈을 감고 싶었던 것 같다.

열두 시에 눈을 떴다. 밥을 차려 먹었다. 곧 돌아올 아이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했다. 아이들의 방과후 시간을 챙겨 주다 보면 저녁 시간이 돌아온다. 저녁거리를 준비하고 다 같이 밥을 먹고 치우면 밤이 된다. 어둠이 무서웠다. 고요가 내 현재에 자꾸만 파고드는 것이 불편했다. 피하고 싶었다. 맥주를 한 잔 따라 청량감으로 몸을 채우면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술 한 잔의 위력은 아침까지 가지 않았다. 악몽으로 나를 깨워 현실을 보라고 명령하는 새벽이 언제나 나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아까 말한 패턴대로 하루가 흘러갔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고 쌓여 6개월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는 흐름이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채 6개월이 흐르다니, 너무 생경했다. 나의 하루 패턴은 나를 성장시키기는커녕 퇴보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시간은 앞으로 나아간다. 시간과 내가 속도와 방향이 맞지 않는 기이한 파트너 같았다.

전진하는 시간과 후퇴하는 내가 공존하는 장소는 이사한 집이었다. 집은 내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없어도 내 존재가 허락된 곳. 밥도 먹고 똥도 싸고 잠도 자고 모든 게 가능한 집. 문득 그 집이 내 나약함을 서서히 성장시키는 위험한 실험실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지?




나의 ‘무 계획’에도 단 하나 계획된 게 있었다. 내 작업실. 명함도 사무실도 없는 내가 갈 곳이 집 안에 있다면 퇴사와 이사의 리스크를 완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정말로 맞았다. 이 집을 고를 때 아이들 방과 방 사이에 있는 작은 공간을 내 작업실로 염두에 두었었다. 세 칸짜리 책장을 두 칸과 한 칸으로 나누어 세우고, 두 칸 책장 앞에 넓은 책상을 두었다. 서재 겸 작업실로 사용하기 맞춤한 곳인데, 서향이라 여름 그곳은 찜질방과 다름없었다. 나는 덥다는 핑계로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9월이 되어 나는 작업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접근금지 경고판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내가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나는 허탈함에 웃음이 났다.


그날 책상에 오랜만에 앉아 책장에 보금자리를 튼 책들의 책등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형제 이름처럼 익숙한 이름들이었는데, 이상하게 낯설고 새롭게 다가왔다. 맞아, 이런 책도 있었지, 이건 무슨 내용이었더라. 이 책은 정말 사서 펼쳐만 보고 아예 읽을 생각도 안 했었네, 그래 이 책은 내 힘든 30대를 버티게 했지, 이건 내 열정의 20대였고…. 책등의 제목들과 재회했던 그날, 나는 설렜다. 근 6개월간 잃어버렸던 내 속의 나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작업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권 한 권 책을 꺼내 조심스럽게 읽었다. 일을 위해 읽는 책이 아니므로 그날그날 마음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으면 그걸 계속 읽어 나갔고, 재미가 없어지면 덮고 다른 책을 꺼내 읽었다.

나는 책 만들기를 업으로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책은 내게 생계수단이었다. 늘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2년 전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십몇 년을 제대로 책을 읽지 않았었구나. 나는 아무런 조건과 부담 없이 책 내용에 파묻혀 새벽을 맞이했던 청소년 시절처럼 순수하게 책 내용에 몰입했다. 아니, 몰입할 책들을 골라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책을 본능이 집어냈다. 그 책들 중 상당수가 이전에 내가 그리 관심 갖지 않았던 종류여서 나조차 놀랐다.




당시 내가 밑줄을 쳐가며 한 줄 한 줄 새기듯이 읽었던 책이 있다. 그것은 박승오, 홍승완 작가가 공저한 《위대한 멈춤》(열린책들, 2016)이라는 책이다. 책장에 꽂혔던 지는 꽤 되었는데, 그때 휘리릭 보고는 읽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책이 아니었다. 내 책이 아니라는 건 내가 볼 필요가 없는 책이라는 뜻이다.

2017년 나는 멈춤은커녕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는 경주마였다. 내가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달리고 달리는 한 마리 말. 아무리 지쳐도 누군가 나를 불러도 달리는 동력을 멈추면 그대로 고장이 날 것만 같았는지 멈추지 못했다. 마라톤을 해본 사람은 안다. 힘들다고 멈추면 그대로 주저앉아 다시는 결승선을 향해 뛰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러니 ‘멈춤’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두면 안 되었다. 심지어 멈춤이 위대하다니, 정말 나를 뒤흔들려고 작정한 제목 아닌가.

하지만 경주마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영원히 달리지는 못한다. 마라톤도 42.195킬로미터라는 정확한 목표 수치를 가지고 있다. 생각 없이 달리던 나는 결국 엔진 과열을 느꼈고, 이태 전에 멈춤을 선택했다.

느낄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를. 나의 멈춤은 매우 충동적이었다. ‘무 계획’이라는 표현대로 멈춤에 대한 숙고가 없었다. 또한 죽지 않기 위해 한 선택,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멈출 때까지도 나는 달렸고, 이대로 100미터만 더 가다가는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에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므로 준비되었거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나에게는 무력감과 상실감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이렇게 방황하던 나에게 《위대한 멈춤》의 두 저자는 자신들의 멈춤의 경험을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그들 또한 멈춤이 선택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그 멈춤을 인생의 전환기로 활용했는지를 밝힌다. 이를 위해 위대한 전환자들의 아홉 가지 도구를 소개한다. 그중 첫 번째 도구인 ‘독서’ 항목이 전환기에는 “끌려서 읽는”으로 규정된다. 일상기 때는 “필요해서 읽는”이었는데 말이다. 당시의 내 상황과 너무도 흡사해서, 그러니까 끌려서 읽다 보니 이 책을 집어 들고 밑줄을 치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 거의 울 뻔했다. 많이 감사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읽었을 거라고 생각지는 마시길. 중간중간 ‘끌리지 않는’ 내용은 과감하게 스킵하고 끌리는 제목으로 바로 이동했다. 메시지에 충실한 독서였으며, 그랬기에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비로소 내 마음속 욕망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나에게 잊힌, 되고 싶은 나였다. 그걸 알아채기까지 이렇게 긴 시간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억울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충실했던 삶이 앞으로의 삶을 버텨낼 자산이 될 것임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책을 읽으며 오해를 조금씩 풀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 ‘위대한 멈춤’이란 멈춤 중에서 위대한 멈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멈춤이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한 것이며, 그것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할 수 있다는 뜻임을.




오늘 나는 2년 만에 그 책을 다시 펼쳤다. 그 이유는 이거다.

오늘 아침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요가를 하고
독서를 하고
명상을 하고
글을 쓴다.     


내가 지금부터 10년 동안 변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루를 채우며 할 일을 쓴 것이다. 이렇게 10년을 살아가고 10년이 지난 뒤에도 이런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쓰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수십 년을 생각지 못했던 삶의 내용인데 말이다.

왠지 《위대한 멈춤》을 열면 답이 있을 것 같았고, 나는 그 책을 책장에서 꺼내 펼쳤다. 그리고 발견했다. 그것은 2년 전 내가 밑줄 친 부분이기도 했다.     


“삶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50쪽)     


이 표현 자체가 나에게는 일종의 전환이었다. 내가 무엇을 이루는 게 아니고 삶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다니.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내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가 “요가, 독서, 명상, 쓰기”다. 공교롭게도 요가는 이 책을 읽었던 시점에 시작했다.     


“전환의 귀착점은 …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53쪽)     


나는 내 자신이 되기 위해 둘을 함께 가져가려 한다. 왜 그 둘인지에 대해서 밝히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며 오늘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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