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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Oct 15. 2023

이분법 세상

8년 전 일기에서 지금보다 성숙한 나를 발견하다

곧 4자를 단다.     


운전연수강사 없이 나 혼자 처음 서울시내 주행을 하면서는

슁슁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차선변경을 자유로이 하는

내 옆 모든 차의 운전자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심을 품었다.

손은 물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11월의 추운 날씨였음에도.

그때의 세상은 운전에 능숙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었다.     


석사논문을 쓰며 매일 밤 11시에 학교에서 나설 때는

못 피우는 담배라도 고통을 덜어줄까 골초 친구에게 담배를 빌려

계단에서 입담배로 내 실력 없음을 토해냈다.

아! 그때는 세상이 논문을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첫아이 수유를 할 때. 능숙하지 못한 실력 때문인지 유선염에 걸려

아직 산후조리 기간임에도 혼자 택시 타고 병원을 오가며

몇 차례 퉁퉁 부은 가슴에서 큰 주삿바늘로 피고름을 짜내었다.

덕분에 산후풍까지 덤으로 가졌다.

그때는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을 나누었지.     


사랑에 빠질 때는 핑크빛 상상으로 물든 연초록과

헛헛한 외로움의 노랑으로 세상이 이분되었고,

이별을 목전에 두었을 때는

세상이 눈물과 쓴웃음으로밖에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세상이 둘로 나뉜다.

자잘한 일상에서 늘 마주한다.

매달 쓰는 기획안이 여지없이 이번 달의 숙제로 돌아올 때.

두 시간 안에 완성되어야 하는 초조함에 연거푸 맹물을 마셔댈 때면,

기획안밖에 답이 없는 세상에서 기획안 없이도 충분히 돌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친구 만나 술 한잔하며 수다 떨고 싶은 욕구에 가슴이 빵하고 터질 것 같은데,

오늘 나 없이는 거둬줄 이 없어 불쌍하게 울고 있어야 하는 두 아이들을 위해

나의 욕구를 발목에 수갑 채워 질질 끌고 가는 퇴근길에서

세상은 6시 이후의 시간이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나의 세상은 늘 이분법이다.

얼마 뒤면 나에게 4라는 숫자를 선사할 2016년 앞에서

나는 또 세상을 나누려 한다.

어떤 것에도 태연한 굳건함을 지닌 사람과

별로 큰일도 아닌데 휘청휘청 상황에 따라 감정기복이 있는 나 같은 사람으로.     


적어도 내년부턴 이분하지 않는 의연함을 갖고 싶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둘로 나누지 않아도

세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연함.     


굳이 그걸 내년이라는 미래로 설정해서

지금은 자신감이 없음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그렇게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딱 지금의 가을 날씨처럼

따뜻하면서도 선선한 사람이면 좋겠다,

나란 인간이.     


2015년 9월 16일 오후




2023년 10월 15일 오후에 발견한 일기 내용.

8년 전 내가 시랑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얼마나 성숙해졌나. 그때의 내가 원하는 만큼 성장했나.

최소한 내가 나를 사랑으로 바라볼 만큼 지금의 나는 여유롭고  따뜻하다고 해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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