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연.
경준에게 혜연은 ‘여자’가 아니었다.
아니었다, 는 과거형이니,
지금도 아니다, 라고 말을 몇 번 해두었다.
위력이 없는 언어였다 물론.
처음부터 둘의 관계는 이상했다.
애매했다.
한없이 가깝고 친했다.
그 둘은 그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둘은 늘 붙어 다니는 ‘쌍’이었다.
정작 둔한 이 둘은 그걸 잘 몰랐다.
10명이 넘게 있는 자리에서도
대화는 둘이 했고,
둘은 옆에 앉아 있었다.
마주보고 앉는 것도 답답했는지
옆에 앉았다.
‘앉아 있었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경준이가 잔머리를 굴려 혜연 옆에 의도적으로 앉은 게 아니었기 때문.
그저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물어볼 수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정리는 안 된다.
그런데 그런 게 있었다.
명시적으로 말한 바 없지만,
몇몇 내용은 서로 알아서 잘도 피해갔다. 이럴 때만 그들은 똑똑했다.
그 어떤 경계랄까.
그걸 넘어가면 둘의 달콤한 대화에 방해가 된다, 그러니 그런 주제를 꺼내지 말자, 라는 묵시적 합의가 상호 간 있었던 듯하다.
입만 열면
너는 아직 여자가 아니다, 내 여동생보다 더 동생 같다, 언제 여자 될래, 소개팅 해줄까 따위의 말을 지껄였던 경준.
그런데 보기 좋게
11월 4일 혜연의 생일 전날 그간 지켜온 ‘경계’를 넘어버렸다.
네가 신경이 쓰인다,
너한테 잘해주고 싶지 않은데, 아무튼 신경 쓰인다
너를 신경 쓰는 내가 스스로 낯설고, 좀 별로다.
뭔 말이지?
여자들은 횡설수설하는 걸 싫어해, 라고 ‘연애 바보’ 한철과 훈석에게 상담을 해주곤 했던 잘난 경준.
멋대가리 없게 경준은 그날 무너졌다.
그렇다고 더 관계를 진전할 것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둘 다 그랬다.
그게 문제였다.
강준만의 책을 끼고 다니면 경준,
어린 맘에 ‘실명 비판’에 앞장섰던 강준만의 매력에 흠뻑 취해
학교에서, 직장에서, 동호회에서도 그 비슷한 무언가를 따라 하다가
결국은 부족한 논리로 역풍만 맞은 경준.
멋들어진 이론을 배우고 흡수하여 젠체하는 것을 좋아하며,
진보적이지만, 또한 마초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모순적이면서 약간은 모자라서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경준은
혜연이가 욕심났고
혜연이와 본인 사이의 남아 있던 최소한의 ‘거리’를 줄이고 싶었다.
둘은 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는 문장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면서.
서먹서먹함과 예전에 비해 더 어정쩡해진 둘의 관계.
주변 사람들 눈에도 그것이 보일 터.
소문은 역시 또 이상하게 났다.
혜연이가 선배 혹은 오빠라고 번갈아 부르는 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들어간 건
시간문제였고
혜연과 경준은
눈에 딱 보이는 무언가를 저지르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어찌 됐건 죄인이 되어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소문은 대개
여성에게 지나치게 가혹했고
“사실 내가 개새끼야”라고 암만 경준이가 말해봤자,
더 드라마틱한 스토리만 창작되어 살이 붙을 뿐이었다.
경준은 그렇게
무력했다.
경계를 제대로 넘지고 못하고, 거리를 제대로 좁힐 깜냥도 안 되면서
혜연에게 피해만 주고 말았다.
경준이가
빠르면 1달에 1권씩 나온다는
강준만의 책을
다시 집중해서 읽게 된 건 반년이 지나서였다.
혜연은
혜연과의 대화는
그 시간은
옅어져 갔다.
그러다
다 같이 모이는 날
혜연을 봐야만 하는 날이 잡혔다.
그런 상황이 꼭 있지 않은가.
혜연은
안 그래도 날씬하면서
더 독하게 살을 빼고
딱 붙는 블라우스를 입고
처음 보는 귀걸이와
달라진 입술 색깔로
경준이가 앉은 테이블 옆으로
지나갔다.
차가운 척, 하려 했으나 귀여웠다.
도도하고 섹시한 컨셉인 것 같은데
경준의 눈에는 여전히 예쁜 인형이었다.
경준이는 혜연을 보고 안고 싶다, 그 이상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겉모습을 많이 바꿨지만
경준에게
혜연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바로 어제 본 것 같았다.
제자리를 잡아야 서로 좋은 것인데,
더 멀어진 그 거리를 다시 조정하고자 하는
그 둘은
그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