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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알라 Aug 11. 2020

치킨집에서 치킨을 안 먹는다고?

비건, 치킨집에 가다.


일주일 전부터 회식 공지가 올라왔는데 장소는 바로 다름 아닌 치킨집이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고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란 생각이 뒤따랐다. 근 1년 동안 회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 회식엔 꼭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킨집에 간다면 치킨을 먹을 터, 그리고 ‘비건 선언’을 한 나는 치킨을 먹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래도 서로가 조금은 신경 쓰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회식에 올 거냐는 동료들의 물음에 나는 “저 이제 고기 안 먹잖아요 ㅎㅎ 저도 정말 가고 싶은데 아쉽네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일주일 동안 치킨집에 가서 샐러드를 시켜주겠다며 같이 가자는 동료도 있었고 집에서 방울토마토와 거봉을 싸오겠다며 열심히 꼬드기는 동료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나도 역시 그걸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을 내비쳐줘서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결국 꼬드김에 넘어간 나는 일주일 뒤였던 어제, 치킨집에 입성했다.


메인 메뉴인 치킨이 나오고 다들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근데 여기서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 동료들 중 제일 무뚝뚝하고 누구를 챙겨주는 게 부끄럽고 조금은 어려운 듯 보이는 두 사람이 손수(!) 닭가슴살만 발라서 내 앞 접시에 덜어 주는 게 아닌가. (그럴 성격이 전혀 아닌데.. 심지어 다른 테이블이었는데 말이다.)

순간 아 먹어야 하나.. 고민했다.

치킨이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성의를 무시하기가 미안해서.

하지만 한 달 넘게 철저하게 지켜온 내 자신과의 약속을 단지 미안하다는 이유로 단 한 번의 포크질로 허망하게 날려버릴 순 없었다. 안 먹어서 불편한 마음보다 먹고 싶지 않은 마음이 훨씬 더 컸기도 했고.


눈 앞에 치킨이 펼쳐져 있는데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나를 보고 “역시 00 누나 의지는 못 꺾어” 라고 누군가가 말했고, 아마 몇 명은 설마 치킨집까지 왔는데 진짜 치킨을 안 먹겠어..? 라는 생각도 분명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치킨집에서 치킨을 안 먹는 사람이었고 그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치킨’만’ 안 먹었을 뿐.


괜찮다는 나를 두고 다들 메뉴판에서 샐러드를 찾기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치킨집은 샐러드를 팔지 않았고 대신 나는 기분 좋게 황도를 거하게 먹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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