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에서 일한다 했잖아요.
도착 후 하고 싶은 첫 번째 이야기는,
"하버드, 세계 최고의 대학, 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지에 대해서"
가 아니다.
꾸며내려면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
순간순간 웃으며 찍은 사진들을 활용해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로 둔갑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내 경험과 기록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용으로 기만하고 싶지는 않더라고.
도착한 후 일주일 동안 느꼈던, 속상하고 화나고 짜증나고 불만 가득했던 에피소드들과 그로 인해 얻은 내 생각을 담아내고 싶은 글이다.
내가 하버드에서의 빅데이터 프로젝트에 인턴으로 참여할 수 있게 도와준 단체는 AIESEC(아이섹)이다. 아이섹은 126개국에서 2,400개의 대학의 70,000명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인턴십 자리를 만들어내고 해외인턴십을 경험할 수 있게 중개해주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대학생 자치 단체이다.
2011년~2013년에 이 단체에서 1년은 External Relations (대외협력부서)의 멤버로, 1년은 고려대학교의 지부장으로 활동했었다. 당시에는 해외인턴십과 관련된 부서에서 몸담지 않았었고, 지부장으로서 '지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리더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었기 때문에 우리가 제공하는 '해외인턴십'이라는 상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상품에 대해 잘 모른 채로, 멋들어진 브랜딩과 홍보만을 통해 파는 것이 얼마나 자기기만적인 행동이었는지 이 곳에 와서 아주 많이 느끼고 있다.
그 이유는 이 프로젝트를 만들어 낸 아이섹 지부가 책임감의 부재, 소통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숙소 문제였다. 확정된 인턴들의 숫자는 11. 그런데 잡아놓은 숙소는 세 곳. 한 곳은 5명, 다른 한 곳은 4명, 다른 한 곳은 1명. 숙소에 수용 가능한 최대 인원은 10명으로 잡아놓고 1명은 어디에 끼워넣으려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원래 오기로 한 인턴은 14명인데 개인적인 문제와 더불어 확실하지 않은 숙소 문제로 3명이 오기도 전에 중도하차했다.
심지어 나는 처음 도착한 날 밤에 처음 보는 남자애와 혼숙을 하게 됐다. 한 방에서. 내가 전전긍긍하자 그 친구가 본인은 게이라며 자신의 남자친구 사진도 보여주고 해서 믿고 지냈다. (지금은 다른 여자 두 명이 더 들어왔고, 그와는 엄청 친해져서 서로의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엄청 하고 아시아인으로 식성도 비슷해서 같이 밥도 만들어 먹으며 잘 지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자 남자애의 이름을 여자 이름으로 착각해서 방을 배정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지를 않나, 우리가 낸 금액을 다 합쳐서 이 정도 숙소밖에 못 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훨씬 좋은 가격과 시설의 숙소를 에어비앤비에서 찾아내 옮겨달라 하자 이미 계약은 끝났다며 의견을 묵살하지를 않나, 우리가 도착하기 일주일 정도 전에 숙소 계약을 마치지를 않나(그 전에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 공지하면서 반드시 여자 한 명은 혼자 지내도록 방을 배정하지 않나, 방 가격을 같이 사는 사람한테 물어봐서 알게 되었는데 뻥튀기한 가격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지를 않나... 여러모로 문제점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미팅을 가지자 해서 그 곳에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꺼냈다. 너희는 아이섹 활동에 대해 책임감이 없어 보인다고. 한국의 지부들은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들어오는 인턴에 대한 엄청난 책임감을 가지는데 너희는 너무 다른 것 같다고. 아이섹 정관에 보면 숙소에 대한 정보를 모두 공유해야 한다는 조항 있는거 아냐고 읽어보긴 했냐고, 우린 오기 전에 그 누구도 숙소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고. 정관을 들이대니 이것까지 얘기할 줄은 몰랐던 듯 당황해하며 미안하다며 다음엔 더 개선하겠단다.
물론 여기의 아이섹 멤버들 중에도 좋은 친구들이 많다. 내가 정말 화났던 것은, Executive Board(EB), 지부 집행부라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우리와도 소통하지 않고, 하버드 프로젝트 자체가 엄청 대단하고 누구나 오고 싶어 하는거니까 여기 온 너희는 숙소가 어떻든 안전이 어떻든 그냥 감사하고 다녀라 라는 태도였다. 더불어, 아이섹의 메인 상품인 인턴십에서의 문제는 차일피일 미루고 잘 해결하지 못하면서 페이스북에는 멋진 사진과 글귀 등으로 아이섹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포스팅을 올릴 때마다 정-말 속상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싶어서.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내가 아이섹을 할 때에는 얼마나 이에 대해 신경을 썼었던가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섹이라는 이름을 믿고 해외인턴십을 경험하려는 우리나라, 외국의 학생들에게 그만큼의 신뢰와 만족을 안겨주었었는가. 나도 혹시 그들에게는 소홀하고 잘 대하지 못했으면서,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 신경쓰지는 않았던가. 지부 status를 위한 수치를 올리기 위해서만 일하지는 않았던가. 어디든 불만 없이 만족하고 다녀올 수 있을 고객을 찾지는 않았던가.....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무언가를 파는 곳에 들어가게 된다면 반드시 생각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어떤 '상품'을 팔 때에, 심지어 그 상품이 개인의 목숨, 안전, 시간, 경험 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 때에는 브랜딩 뿐 아니라, 상품 자체의 질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충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 가 아니라, 판매자인 내가 그것을 사용하고 경험할 때 만족할 수 있어야 소비자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내가 몸담게 될 곳도 성장할 수 있다. 경험의 중요성이 바로 이런 데에서 느껴지는 건가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있다.
'외국인은 전부 엄청 독립적이고, 자기 의견 뚜렷하고 그렇지 않아?! 한국인은~ 너무 집단주의적이고, 자기 의견도 잘 못 말하고.....'
내가 여기서 느낀 것은 지극히 반대였다.
위에서 언급한 숙소 문제에 대해 90%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담당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국인인 우리였다. 인턴들끼리 있을 때에는 자기들이 가지는 불만 말하고, 왓츠앱으로 계속 서로 물어보고 눈치 싸움하면서. 막상 담당자들만 만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던 그들. 총대 메고 말한 것도 나. 담당자들이 기분 나빴을 수 있지만 지적한 것도 나....
해결이 되면 다들 만족하면서, 그 전까지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다. 담당자들에게는 '예민한 한국인'으로 보이겠지만 분명 그들은 필요한 것을 요구했던 우리 덕분에 사과를 받을 수 있었고, 잘못한 것을 인정하게 했다. 숙소 문제가 원하는대로 완벽히 해결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나는 확신했다. 이전에는 분명 민족적인 특성이라는 것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만난 대부분의 인턴들은 자기 의견을 잘 내비치지 않으며, 우유부단함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한 명은 나에게 "한국인들은 자기 의견 잘 말 안하고 조용하게만 지내는 줄 알았는데 넌 아니더라." 라고 말했다. 그래, 우리는 우리에 대해 '소극적인' 민족으로 규정지을 필요가 전혀 없다.
분명 우리나라에 대해 불만도 많다. 그런데 외국에 나와볼 때마다 "아, 그래도 나는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구나."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도 많은 친구들이 한국에 대해 developed country 라고 얘기한다. 안으로 곪아 썩어들어가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가 좀 더 깨어나면 분명히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치료해야 하는 것이지, 제3자인 누군가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는, 밝고 멋지고 근사한 에피소드이기를 기원하며.
Wish me Good Luck in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