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테이블>을 보고
※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감상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김종관 감독의 전작인 <최악의 하루>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나처럼 많이 기다리지 않았을까. 신선했던 그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좋았던 사람이라면 공감할텐데. 덤덤하게 흘러가는 그의 영화는,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씬이 있는데도 또 상상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들이 아무 말 없이 걸어가는 장면에서 추측하게 되는 거다. '쟤들 지금 무슨 생각 하면서 걷고 있을까. 아까 이런 얘기 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매력이다. 장면을 보고 분위기, 인물 간의 기류, 할 법한 마음속 말과 생각을 상상하는 것이 영화를 여러 번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종관 감독이 영화를 풀어가는 방식은 기분 좋은 곱씹음이라 더 기대하게 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마음들이 지나갈까 싶어서.
<더 테이블>에서도 역시나 끊임없이 상상했다. 어? 뭐지? 누구지? 왜 만난 거지? 전에는 어떤 사이였길래? 무슨 변화가 생겼었나? 왜 저 말을 꺼내는거지? 그러다 보니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등장인물의 눈빛에 집중하게 되고, 상황에 자연스레 빠져들게 된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그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만났던 지점들을 에피소드 별로 하나씩 짚어보았다.
헤어진 커플이 다시 만난다는 것은, 역시 쿨할 수 없는 걸까. 마스크와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온 유진은 약간 상기되어 보인다. 저만큼 가린 걸 보니 연예인 인가 보네. 누굴 만나러 온 걸까. 어? 왔다. 유진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나누는 대화를 들으니 창석이 전 남자 친구였기 때문인 듯 하다. 오히려 창석이 더 덤덤해 보이네.
아니, 근데 회사 근처인데도 늦게 온 거야? 대체 그런 건 왜 물어봐? (하 -) (헛웃음) 야 사진 찍는 거 자랑하려고 찍자는거 아니라며 왜 카톡 보내는 '슝' 소리가 나는 건데? 아, 어느새 유진의 눈빛이 차가워져 있다. 어쩌면 "난 많이 변했는데, 역시나 넌 변한 게 없네' 라는 눈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경진은 왜 저렇게 초조해 보이는 걸까. 민호는 경진보다는 여유로워 보인다. 이 둘은 무슨 사이였을까. "이거 놓고 가셔서요." 시계. 아, 남자가 시계를 풀었다는 건...? 그랬구나. 아니, 이 자식은 그러고 여행을 떠난 거야? 그래서 미리 말한 거라고, 알고 있지 않았냐고? 이 자식도 말인지 방구인지 모르겠네. 그래, 잘 생각했어 경진아 그냥 가버려.
순간 급히 잡는 손. 미묘한 차이로 좀 더 격하게 흔들리는 화면. 가까이 클로즈업되는 그들의 표정. 흐름이 바뀐다. 민호가 주고 싶은 게 있었다며 안주머니에서 선물을 꺼낸다. 시계다. 장인의 오래된 시계가 경진의 손목에서 반짝인다. 경진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민호의 표정에서도 설레는 긴장이 묻어 나온다. 결국 둘은 민호의 집에 파스타를 먹으러 간다.
"법적으로 저 아직 처녀예요." 예고편 영상 은희의 말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를 도발하는 강한 여성 역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오후 다섯 시의 빛이 들어오는 카페에 앉은 두 여자의 대화는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온 거라 생각해 주시면 되구요, 걱정 마세요, 영어는 잘 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OO대 @@과 졸업한 거예요. 식까지 참석하시는 걸로 해서 제가 150 해드릴게요." 아, 결혼식 알바를 구하는 현장이구나. 이런 건 처음 본다. 되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네, 정말 딱 비즈니스 관계 같다.
"그런데...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자수성가도 아니라면서요. 왜 이렇게 혼인신고까지 하는 큰 건을?" "... 좋아서 하는 거예요. 아직까지는요." 기류가 바뀐다. 사무적인 태도로 대하던 은희의 표정이 바뀐다. 숙자의 표정도 바뀐다. 그 날에 아껴두던 옷을 꺼내입겠다고 한다. 은희가 대답한다. "제 어릴 적 별명은 거북이었어요. 느림보 거북이."
"술 마셨어?" 밖에서 담배 피우고 오는 혜경에게 핀잔 던지듯 말을 건네는 운철.
"결혼은 결혼이고, 따로 만나면 되잖아."
"... 안 돼."
"그럼 결혼하기 전까지만"
".... 안 돼. 조신하게 살아 조신하게~"
분명히 끊길 듯 끊기지 않을 듯 미묘하게 이어지던 감정선이었는데, 힘겨워 보이던 꽤 단호한 몇 번의 거절에, 생각보다 쉽게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아마도 뫼비우스의 띠 같았던 그것이, 드디어, 직각으로 가위를 만난 것인가보다. 그럼 더 이상 안 만나게 되니까.
70분의 러닝 타임 동안 (훔쳐) 들은 그들의 이야기는 인상 깊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한 번, 이렇게 상세하게 적어내려 가면서 두 번 그들의 마음을 추측해 보니, 현대인들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관음'의 욕구를 오피셜하게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히치콕의 <이창>처럼.
# 그 밖의 감상 포인트
1. 스타 배우 유진이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는 그것
2. 민호가 가져온 선물(들)
3. 어디가 매력의 끝일까 은희는, 아니 한예리는.
4. 술 마신 후 홍차는 사실 조금 낯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