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그럼에도, 나는 영화감독을 꿈꾼다>를 읽고
주변에 영화인이 되고자 하는 친구들이 몇몇 있다. 그들의 삶을 살짝 훔쳐보고 훔쳐들었을 때 조금(아니 많이) 놀랐다. 생각보다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쓰고 많이 찍고, 그냥 그게 다였다.
대학 졸업 후 한예종 대학원을 준비하던 친구의 일상은 눈떠서부터 눈감을 때까지 오로지 '영화'로 가득 차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직행하는 곳은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그 곳엔 쉽게 찾을 수 없는 옛날 영화들이 많다. 꺼내서 보고 또보고 곱씹고 꼭꼭 씹어 삼켰다고 했다.
대학생 때였다. 어느날 그가 계모임 친구들을 불렀다. 진짜 엄청난 영화가 있는데 누리꿈스퀘어에서 공짜로 상영해준다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했다. 영화 감독 지망생이 극찬하는 영화라면 얼마나 명작일까, 싶어 친구들과 함께 쭐레쭐레 따라갔다.
그렇다. 분명 명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맨 앞 프로덕션 소개 영상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러닝타임 내내 졸았기 때문이다. 초대해준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어쩔 수 없는 상업영화 러버니까. 친구도 이해했다. 같이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인사로 그 날 영화 급번개는 훈훈하게 끝났다.
결국 내 친구는 한예종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영화를 더 깊게 만나고 있다. 1년에 한두번 만나는 친구의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가끔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주 옛날옛적 나는 잘 모르는 영화에 대해서만 얘기하길래, 아 저 녀석은 왜자꾸 모르는 영화 얘기만 하는거야 라며 혼자 승질낸 적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그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콘텐츠를 꾸린 이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친구 이야기 같아서. 그리고 내 (현) 직업도 에디터이기 때문에,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것 -과 같은 창작 활동으로 돈을 버는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았다.
종합 예술인 영화보다 소박하게 콘텐츠를 만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처럼 영감(inspiration)을 얻기 위한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꾸준히 보내기는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시간을 견뎌낸 이후 써내려 가는 글 혹은 (회사일 경우 검토를 받아야 하는) 기획안이 "진-짜 이거 잘 읽히겠다. 완전 대박나겠는데." 라는 칭찬이나 컨펌을 받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칭찬과 컨펌받기만 어려울 뿐이랴. 심지어 컨펌 받은 글을 발행한 이후에도 이 글이 독자들의 선택과 박수갈채를 받을지 안 받을지는 당췌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왜 사서 고생하냐. 그 불안한 길을 그렇게 걷게' 라고 말하는 영화감독 지망생의 길을 걷고 있는 15명의 이야기가 마음을 계속 두드렸다. 모두가 한 명처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래에는 인상깊었던 이야기들을 모아 소개한다.
1. 왜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살아요?
"40대 중후반만 해도 예전에는 한창인 나이였는데 이제는 어느 직업이든 회사에서 나갈 시기고. 50살도 되기 전에 대부분 쫓겨나잖아요. 그런 점을 생각하면 영화판의 불안정성이 더 큰 것 같지는 않아요. 요즘에는 그냥 뭘 하든 다 힘들다고 생각해서요. 어디든 철밥통은 없고."
"남들 다 공무원이 좋다, 좋다 하잖아요. 저는 이해가 안 가요. 결국 빚지고 사는 건 다 똑같거든요. 영화를 하나 공무원을 하나. 그럴 거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배고픈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안하면 못 하죠’, ‘별로 안 불안해요’와 같은 대답들이 많이 나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 정면으로 불안정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불안정성에 친숙했고, 불안정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거나,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 그들은 묻는다. "그렇게 사나, 이렇게 사나 다 불안한데 왜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살아요?"
2.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야 한다.
지망생들은 창작의 근원을 쌓기 위해서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출발점은 인문학이었다. 지망생들은 당장 생산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할지라도 시간을 들여 인문학 공부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셰익스피어, 체호프의 희곡 같은 고전 작품을 읽거나, 미술사나 철학사 원론을 읽었다.
감독 지망생들의 시나리오 작업 과정은 공통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될 수 있었다. 먼저 창작을 위한 양분을 쌓는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 지망생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인문학적 내실을 다지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자극을 받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지면 시나리오 구상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는 '멍 때리기', 자신만의 시각 만들기 등 세부적인 과정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실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단계에서 지망생들은 이성적으로 이야기와 주제를 조율하고, 감성적으로 몰입하는 과정을 거친다. ...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풋(input)에 들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3. 작품은 시대의 명암을 반영한다.
올해는 유독 집과 관련된 주제가 많았다. 이 화두는 특정 연령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젊은 감독들이 현실을 영화화할 때, 반드시 대면해야 하는 과제처럼 보였다. 집을 버리고 나온 어린 아이들, 돌아갈 집을 갖지 못한 채 방치된 아이들, 집세를 내지 못해 전전긍긍하거나 쫓겨난 청년들, 무너져 가는 초라한 집에서라도 버티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는 청년들, 그리하여 결국 거리를 집으로 삼거나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탈출하는 방법 이외에는 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다수였다.
인간의 기본권 앞에서조차 발버둥 쳐야 하는 상황으로의 끔찍한 후퇴가 과감하고 독창적인 영화적 상상력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4. 인내와 끈기로 채워지는 과정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우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것이 어떨까. 꼭 대단한 무언가가 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by 한주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