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위로를 보내준.
3년 전 ‘연말 결산 글쓰기’를 해본 후 너무 좋아서 매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 해를 정리하는 데에는 글 만한 녀석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써야지 생각만 하고 때를 놓쳐서 참 아쉬웠는데, 올해는 지난 달부터 연말 결산 글쓰기 용 아이템을 고민했다. 그냥 보내면 또 한 해 내내 아쉬워할 것 같아서.
번뜩이는 기획안을 내보려고 이리저리 고민해봤지만 결국 글 다루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편안한 주제로 정했다. 올 한 해 나를 응원해준 ‘문장’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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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갈수록 기록할 문장들이 많아졌다. 당시 힘들었던 그녀가 스스로를 응원, 위로하기 위해 쓴 문장들 같았다. 몇 년 후 내게도 이 문장들은 응원과 위로가 됐다.
세상을 이해하는 나만의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과연 글쓰기로 먹고 살 수 있을지 고민했고, 분명 내가 쓴 글인데도 내 문장 같지 않아서 고민했고, 지금 겪는 이 모든 경험의 순간이 대체 어디에 쓰일까 고민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순간들을 단번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문장 때문에 힘들어도 결국은 문장으로 극복해 낸다.
쓰고서야 이해한다. 방금 흘린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방금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힘들었는지,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랬는지, 왜 그때 나는 그랬는지.
쓰고 나서야 희뿌연 사태는 또렷해진다.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그러니 쓴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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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다.’ 이 문장이 너무 벅차, 너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인생은 한 번도 내게 이토록 호락호락하진 않았는데 싶어 많이 울며 걸었던 아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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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쓰기와 저 글쓰기가 위로하니까. 저 글쓰기를 하면서 모호해진 나를 이 글쓰기가 다시 또렷하게 만들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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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연결을 시켜서 생각해보지 않을 것들이 한 문장을 듣는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게 무엇이 될 거라는 기대도 없이 가꿔놓은 토양이 제대로 기능해준 것이다. 드물지만 이런 순간이 있다.
결국 잘 쓰기 위해 좋은 토양을 가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ㅡ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당신이 일하는 곳에서 의사가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겠다.
사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한 곳이 의업과 금융업 뿐이겠는가. 사람을 향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는 “인간의 삶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드는 무언가가 누군가의 삶을 더 좋게 바꿀 수도, 누군가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
의사들이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금융권에도 있어야 합니다.
ㅡ 자본주의 제3부: 금융지능은 있는가, EBS다큐
에디터의 ‘기술’에 대해 잘 말해줘서 고마웠던 문장들이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스스로 정리하는 것 외에도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정리가 필요하다 생각했는데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줬달까. 특히 공감했던 부분은 ‘어떻게든 일이 되게 만드는 근성’.
그리고 내가 생각해 본 에디터란 “몸 담고 있는 곳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글로 담아내 전달하는 사람”.
잡지사에서 일할 때에는 (사진가나 디자이너, 헤어 메이크업 스태프가 가진) 기술이 없다는 결핍감을 느꼈지만, 밖으로 나와보니 나에게는 명확한 기술이 있었다.
글 쓰는 기술,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내고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기술, 결과물을 매력적으로 포장하는 기술, 콘셉트를 가지고 선택해서 조합하는 큐레이션의 기술. 그걸 에디터십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디터로 일하면서 내가 익힌 기술 중 가장 큰 부분은, 결국 어떻게든 일이 되게 만드는 근성인 것 같다.
ㅡ JOBS EDITOR 에디터: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는 사람, 매거진B
우리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있는가? 지금 만드는 콘텐츠, 업계 최고인가? 경제/금융 미디어보다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신뢰받는 전문가로서 인정받고 있는가?
내가 만드는 콘텐츠와 현재 내 능력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하게 했던 문장들.
당신의 콘텐츠 마케팅은 업계 최고가 돼야 한다. 모든 경쟁자보다 나아야 하는 것은 물론 당신 영역의 모든 매체사나 출판사보다 나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당신 분야에서 신뢰받는 전문가가 되겠는가?
ㅡ 에픽 콘텐츠 마케팅, 조 풀리지
올해 많이 고민했던 영역이 바로 ‘에버그린 콘텐츠’. 왜 이렇게 이 단어를 많이 썼나 했더니, 스치듯 적어두었던 이 문장 덕분인 듯 하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재미있는 콘텐츠는 일상을 말한다. 환상적인 공간이 아니어도, 꼭 멋진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이런 콘텐츠는 오래도록 사랑받는다. ‘어딘가 부족해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 말해주기 때문이다.
프렌즈(Friends), 더 오피스(The Office)의 등장인물은 우리와 다를 게 없고, 내용도 우리의 일상 그 자체다.
어딘가 부족해도 당신은 괜찮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인생은 괜찮은 거라 말해준다. 그것이 지금 봐도 흥미진진한 이유다.
ㅡ 넷플릭스에 올 것이 왔다, 칼라 맨리 / 티타임즈
20대엔 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한 것 같은데, 30대가 시작된 기념으로 고민 두 가지가 더 생겼다. (앞으로 더 생기겠지만...)
(1) 마흔 살엔 또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이름 앞 붙는 회사 이름 없이도 일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2) 작가가 되려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민낯의 나를 숨김없이 보여줄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데, 난 과연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10년 간 고민해 오던 것에 대해 나름 답을 찾았듯, 앞으로의 10년 동안도 찾아낼 수 있기를. 정답이 아닌 해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