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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약사 Mar 12. 2021

까불이 찬식이


라포(rapport)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상호 신뢰관계를 말하는 심리학 용어로, 약국에서 환자들과 상담하기 위해서는 이 라포의 형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타인과 라포가 잘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고요. 저는 이 라포를 이야기하면 저희 약국에 오는 찬식이가 생각납니다. 




저희 약국은 소아과 인근에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아 환자의 비율이 높은 편인데요. 그중 찬식이라는 다소 별난 아이가 있습니다. 찬식이는 항상 약국 자동문을 부서져라 세게 누르고 들어오고요. 한시도 쉬지 않고 약국 내를 뛰어다닙니다. 진열되어있는 비타민, 영양제들을 꺼내는 것은 예사에다가 가끔은 포장을 뜯기도 하여 보호자가 곤란해하기도 합니다.


약국의 전산 프로그램에는 환자의 특이사항 기록할 수 있는 칸이 있어서 그곳에 '겁나까붐'이라는 타이틀이 생기게 된 것은 찬식이 덕분이었죠. 1호인 찬식이 이후로도 2호, 3호의 '겁나까붐' 아이들이 늘어갔지만 그중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아이는 단연 찬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찬식이가 지나치게 활기찬 것도 있지만, 항상 할머니가 약국에 데려오시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손자 손녀 약 받으러 오시는 경우에는 더욱 세심하게 복약지도를 해야 합니다. 어른이 드시는 약은 대부분 알약으로, 용법에 맞게 포장해 드리면 설명드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소아의 경우에는 시럽을 용량에 맞춰서 병에 붓고 가루약을 털어서 섞고, 어떤 약은 냉장고에 보관, 어떤 약은 실온에,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하며, 저녁에만 먹는 약이 있는가 하면, 필요에 따라 선택해서 먹는 약이 있는 등등 그 복잡성이 더욱 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겁나까붐'1호 찬식이가 오는 날에는 제가 할머니께 설명을 하는 동안 약국이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고 약사님 미안해요. 우리 애가 좀 별나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직 애 인데요 뭐"


대답은 긍정적으로 하지만 속으로는 곤란해했던 적도 많았었죠. 그렇기 때문에 찬식이가 약국에 들어오면 약국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쾅' 자동문 스위치가 세게 눌려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찬식이가 약국으로 달려들어옵니다. 그러면 저는 마치 배달의 민족 짜장면 정신을 장착한 채 '신속', '정확' 1분 1초라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조제, 투약까지 마무리하려고 고군분투하곤 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찬식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별난 아이구나 싶으면서 오늘은 사고를 안쳤으면 싶기도 했고요. 하지만 재작년에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장모님이 봐주시면서 조부모의 육아에는 나름의 고충이 많음을 깨달았답니다. 그 뒤로는 찬식이 할머니도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 이해되게 되었죠.


그때부터였습니다. 찬식이 할머니가 오시면 다른 환자보다 더 신경 써서 설명해 드리고, 찬식이에게도 따로 인사를 건네며 할머니께 약 설명 드릴 동안 얌전히 있어 달라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물론 그 말을 잘 들을 우리 찬식이가 아니죠)


진심은 통하는지 할머니도 매번 고마움을 표현해주시고, 찬식이도 (기분 탓인지) 조금 얌전해진 것 같고요. 그 뒤로 찬식이 할머니는 찬식이 영양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족분들 영양제가 필요하시면 항상 우리 약국으로 사러 오시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처방약이나 파스 같은 제품도 일부러 와주시는 게 보이고요. 얼마 전에는 약국 오픈 시각 20분 전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기도 했었죠.


매출이 올라가는 것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저의 진심이 전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약사의 따뜻한 한마디가 환자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사실 좋은 일이 생겨서 약국에 오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대부분 아프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오는 곳이 약국이죠. 내가 지금 많이 아프고 힘든데, 약사가 퉁명스럽거나 불친절하게 대하면 환자도 좋은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알아주고,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환자분도 나의 진심을 알아줄 것입니다. 오늘도 약국을 방문해 주시는 분들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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