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는서울 남편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초, 중, 고, 대학교를 다 나왔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다음에는 부산 옆에 있는 양산에서 지금까지 주욱 일을 하고 있고요. 태생이 경상도 사람입니다. 군생활을 서울에서 하면서 서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지만 딱히 서울 사람, 부산사람 다른 점을 잘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어느 날 와이프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산, 경남에서 병원, 약국을 하려면 서울 사람이 내려와서 하면 유리 하대"
처음에 저 이야기를 듣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지금이 몇십 년 전 예전도 아니고, 요새 젊은 사람들이 사투리를 강하게 쓰지도 않을 텐데, 서울 사람이라고 무슨 장점이 있다는 거지?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어제, 이러한 저의 편견을 깨어 준 스위트 한 서울 사람을 보았습니다.
오후 7시 50분, 마감을 10분 남겨놓고 30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남자분이 약국으로 들어옵니다. 마른 체형의 남성분이셨는데요. 제가 3년간 약국을 하면서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새로 이사를 오셨거나 지나가다가 들른 분인가? 생각하고 있었죠.
"안녕하세요 약사님. 목이 많이 아픈데 뭐 좋은 약이 있을까요?"
경상도에서는 듣기 힘든 서울말을 쓰는 분이셨습니다. 글로는 잘 표현이 되지 않지만 아주 예의 바르게 말씀을 하시는 분이셨네요.
"네, 누가 드실 약인가요?"
"저희 와이프가 먹을 약입니다. 콧물 가래 등의 감기 증상은 없는데 목이 따갑고 약간 두통도 있다고 하네요. 좋은 약으로 추천 부탁드립니다."
약국을 하시는 약사님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이런 식으로 증상을 설명하면서 '좋은 약을 추천해 달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은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다른 걸 떠나서 일단 '나는 당신의 전문성을 신뢰합니다'라는 태도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음 정말 예의 바른 분이시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감기 증상은 없으신데 목만 따갑고 아프기 때문에 목의 염증을 가라 앉힐 수 있는 약과, 두통을 가라 앉히고 목의 염증을 같이 잡기 위해 소염진통제를 드리겠습니다. 커피나 술은 피해 주시고 미지근한 물을 수시로 드시는 게 좋습니다. 건조하면 목 아픈 게 잘 낫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통은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결제를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분 께서는 저에게 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약사님. 와이프가 지금 생리기간인 거 같은데 그럴 때 이 약을 먹어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소염진통제를 같이 드렸기 때문에 생리통에도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대신 다른 생리통 약은 안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와이프 약 사러 와서 '생리기간인데 약을 먹어도 되나요?'라는 질문은 제가 약사 생활하면서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게 다정한 서울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쌍화탕도 구매할 수 있을까요? 좋은 걸로 한 박스만 주세요."
"네 따뜻하게 해서 드시면 더욱 좋습니다."
그렇게 환자분은 약을 구매해서 약국을 나섰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한테 까지 전해지는 따뜻한 서울남자를 내보내고 슬슬 마감 준비를 하려 하는데, 그분이 다시 약국에 돌아오셨습니다. 두고 가신 물건이라도 있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저기 죄송한데, 쌍화탕 한 박스 구매한 것 중에 한 병만 따듯한 걸로 받아가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온장고에 있는 거랑 한 병만 바꿔서 드릴게요."
당장 집에 가셔서 마실 것은 따뜻한 걸로 바꿔 가는 섬세함! 같은 남자지만 참 멋진 분이었습니다. 이런 게 와이프가 이야기했던 '서울 사람'인가? 약사인 제 마음도 따뜻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퇴근하여 와이프에게 서울남자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내일부터 일할 때 서울말 쓰면서 해볼까?"
잠시 침묵하던 와이프는 저에게
"그런 건 타고나는 거지. 괜히 맘 카페에 이상한 글 올라오는 거 싫으면 그냥 하던 대로 해"
아무래도 서울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타고나는 성격이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