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문학 속으로
용비에 대해서는 중원과 위구르 지역에서 각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용비는 카쉬가르의 지배자이자 중앙아시아 이슬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실존 인물인 아파크 소자의 손녀인 이프라한이다. 이프라한은 북경으로 가는 여행 도중 몸에서 나는 향기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낙타 젖으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 황궁에 도착한 이프라한은 정원과 별궁을 하사 받았지만 향수병에 걸렸다. 그러자 건륭제는 처소 바깥에 모스크와 작은 오아시스, 위구르식 장터를 지어 고향을 보듯 내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듯 극진히 대접받던 이프라한은 금빛 대추가 열리는 나무를 하사 받고 마침내 책봉되었다. 사망 후 건륭제의 명으로 그리던 고향 카쉬가르에 묻혔다.
한편 위구르 지역의 용비 이야기는 좀 어두운 편이다. 위구르 지역 전설에 의하면 용비는 아파크 소자의 손녀가 아니라 야르칸드 칸국, 지금의 위구르 일부이자 타림 분지 일대를 지배한 왕의 딸이다. 건륭제의 명에 따라 위구르를 정벌한 장군 조혜가 용비를 데려왔으나, 용비는 건륭제와의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 옷소매를 잘라 몸을 묶었으며 최후에는 독살당했다. 또는 황태후가 불러 소원을 묻자 자살하고 싶다고 대답하여 그대로 되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상징하는 바가 다양하다. 중원 이야기 속에서 용비는 고귀하고 신비로운 여성으로 그려진다. 건륭제는 위구르의 종교 이슬람을 인정하고, 다산의 상징인 대추나무를 선물하여 양 지역의 결합을 도모한다. 확실히 중국의 용비 이야기는 낭만적이며 청과 위구르의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가 내비친다. 그렇지만 위구르 전설 속의 용비는 비교적 신분이 낮은 데다 황제의 총애를 거부한다. 지역 화합에 대한 시각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실제 향비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건륭제가 용비를 아낀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근거는 재미있게도 당시 조선에 있었다. 청을 방문 중이던 홍대용은 건륭제의 황후가 실질적인 권한을 모두 빼앗기고 냉궁에 갇힌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감금당한 황후는 이듬해 사망했는데, 건륭제는 죽은 황후를 황귀비로 격하시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에 전국에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홍대용의 기록에 따르면 한 관원이 황후의 보석을 전당포에 맡겼으며 황후의 서신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황후의 밀통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여론은 대개 건륭제가 총애하는 후궁이 꾸민 음모라는 설로 기울었다. 밀통이 사실이라면 즉시 폐위를 했지, 황태후에게 불효했다거나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궁색한 이유를 들어 감금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박지원도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음모의 배후는 회후(回后), 회족 출신 후궁이다. 회족이란 신강 위구르의 중국인 무슬림이니 용비 화탁씨를 지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