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애령 Dec 11. 2020

미완의 역사무협소설 <벽혈검碧血劍>(2)

<벽혈검>의 실제 인물들


이자성은 일개 병졸에서 왕의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단 두 달에 불과했지만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대순 왕조를 창업했다는 면에서 명 태조 주원장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명의 멸망의 주요 원인 제공자이자 대역 죄인으로 오랫동안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렇지만 민국시대 이후에는 마오쩌둥 등에 의해 군사적 재능을 재평가 받는 흐름도 일어났고 동상도 세워졌다. 흥미롭게도 그는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실록에는 탈출할 길이 막히자 자결했다고 되어 있지만, 승려가 되어 1674년(강희 13년)에 죽었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벽혈검>에는 원숭환의 죽음으로 숭정제에게 마음이 떠난 장군들이 이자성을 받들어 새 한족 왕조를 창건할 뜻을 모으고 있었다. 그렇지만 북경에 들어온 이자성은 자금성을 약탈하고 치안을 어지럽히는 군사들을 방치한다. 무력은 출중하지만 백성을 돌보고 정치를 안정시켜 태평성대를 가져올 황제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벽혈검>에 묘사된 이들의 만행은 비교적 정사와 일치한다. 이자성에게 실망한 원승지는 이 모습을 보고 외국으로 떠날 마음을 갖게 된다.


주인공 원승지는 원숭환의 적자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원숭환의 아들들은 생사가 확실하지 않다. 아들이 아예 없었다는 말도 있고, 있었지만 죄다 서자였다고도 한다. 청대 기록인 <명사 明史> 원숭환전袁崇煥傳과 <청태종실록靑太宗實錄>에 따르면 한족 문화를 애호했던 건륭제는 비록 적이었으나 원숭환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고 치하하려 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후손을 찾지 못해서 원숭환의 본가 자식을 양자로 삼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민국시대에 다른 기록이 있다. <원독사유사회집袁督師遺事匯輯>에 의하면 원숭환은 서자만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다섯째 아들 원간은 세 아들을 두었고 그 중 하나인 원세복도 아들 둘을 낳았다. 원숭환의 직계 자손이 끊어졌다는 청대 기록과 정반대 이야기다. 물론 적자가 아닌 서자이기 때문에 족보에 올라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장 전란에 대가 끊기게 되면 서자라도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제법 있기 때문에 바로 수긍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민국시대는 한창 민족 정신이 고양되던 시기였다. 당시 시대 분위기상 원숭환 일가가 모두 죽어 건륭제가 양자를 정해주었다는 이야기와, 자손들이 죽지 않고 가문을 이어갔다는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사람들 마음에 와 닿았을까. 아마 후자이지 않을까.


원승지와 마음이 통하지만 원수의 딸이기에 맺어지지 못한 아구 공주의 모델은 숭정제의 차녀 장평공주이다. 역사 속에서 숭정제는 목전에 이자성군이 닥치자 황자들을 도망시키고, 후궁들과 공주들을 손수 죽이고 자살했다. 황후도 자살했고 도망시킨 황자들도 행방불명되거나 살해당했다. 단 한 명의 환관만 곁에 남아 숭정제의 자살을 도왔다고 한다. 이 참사에서 후궁 한 명과 장평공주만 살아남았다.


이전에는 중국 왕조가 멸망해도 황제는 남하하여 작은 영토나마 차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거나, 미리 도망쳐서 체면에 어울리는 최후를 맞을 시간이라도 벌었다. 그러나 숭정제는 궁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사태가 청도 아닌 명의 백성이었던 이자성의 군대 때문에 벌어졌던 것이다.


죽을 뻔한 장평공주는 한쪽 팔이 잘렸지만 이자성에게 발견되어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이자성이 도망친 뒤 외가에 있던 장평공주는 청을 두려워한 외할아버지에 의해 궁으로 보내졌다. 당시 청의 황제 순치제는 장평공주를 거두어 숭정제가 정해주었던 약혼자와 혼인을 시켜주고 지참금도 후하게 주었다. 그러나 장평공주는 오래 살지 못하고 겨우 17살에 죽었다. 부상도 그렇지만 격심한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월극(越劇) <제녀화帝女花>는 장평공주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극중 장평공주는 순치제에게 비구니가 되고 싶다고 청한다. 그러나 순치제는 허락하지 않고, 숭정제와 황후를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조건으로 혼인을 명한다. 장평공주의 혼인을 명 황족이 청에 불만이 없다는 선전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장평공주는 순치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신혼 첫날밤 신랑과 독을 먹고 자살한다.


또 다른 민간전설에 의하면 장평공주는 무공을 닦아 고수가 되었고 여덟 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이들은 청초팔대협(靑初八大俠)이라고 불렸다. 그중 여사랑이라는 제자는 청에 가문이 망한 학자 여유량의 손녀였다. 여사랑은 궁녀로 변장하고 자금성에 들어가 옹정제 암살에 성공했다. 황족이 바깥바람에 기침만 해도 궁인들의 목이 날아가던 시절에 금지옥엽 공주가 웬 무림고수가 되었을 리 만무하지만, 실제 옹정제의 죽음은 미스터리한 면이 있다. 일 중독자라는 평가를 받던 옹정제는 죽기 전전날까지 조회를 주관하다가 다음날 병이 났고, 바로 그 다음날 사망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명쾌하지 않은 면이 분명 있는 것 같다. 옹정제는 정말 암살당한 것일까.


중국 역사 속 황제들은 다른 나라 국왕들 같지 않게 어딘지 신비롭다. 실제로 많은 중국 황제들 중에는 바보와 과대망상증 환자는 물론 대량살인마도 있었다. 그럼에도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천자라는 직책에는 신비적인 색채가 휘감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색채는 서서히 옅어지다가 옹정제에 오면 거의 사라지는 느낌이다. 즉위부터 죽음에 얽힌 어두운 정치적 음모 분위기와 아울러 옹정제 본인이 물 샐 틈 없이 꼼꼼한 정치를 펼쳤던 일 중독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시대 분위기에 무협소설의 세계가 발 딛을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시대 순서로 보면 건륭제 시대를 마지막으로 김용의 무협 세계가 막을 내린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이전 12화 미완의 역사무협소설 <벽혈검碧血劍>(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