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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Dec 11. 2020

미완의 역사무협소설 <벽혈검碧血劍>(3)

<벽혈검>에서 원승지는 원숭환의 유일한 아들이자 그 휘하 장군들이 만든 비밀 조직의 보호를 받고 자라난다. 어릴 적부터 똑똑했던 원승지는 아버지 원숭환의 복수를 목표로 삼았다. 무공을 닦아 숭정제를 죽이고 이자성을 황제로 만들어 명조를 재건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목표를 짊어지고 있지만 원승지는 명랑하고 장난도 좋아하는 활달한 청년으로 그려진다. 젊은 나이에 비해 무공과 인격이 상당하다는 면에서 <서검은구록>의 진가락과 비슷한데, 최종 목적에 실패하고 은거한다는 면에서도 둘은 닮아 있다. 다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진가락에 비해 원승지는 그나마 처음 만난 연인이라도 지켰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모으는 인물이 정작 대업에 실패한다는 줄거리에는 명나라 재건의 꿈이 허무하게 무너져갔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진가락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이 다소 전형적이었던 <서검은구록>에 비해 <벽혈검>은 다채로운 인물들을 보여준다. 세상일에 관심이 없고 바둑만 미치도록 좋아하는 목상도인, 똑똑하지만 어릴 적 마음의 상처로 인해 심한 질투를 보이는 온청청, 후크 선장처럼 한쪽 팔 대신 의수를 꽂고 다니는 오독교주 하철수, 사랑 때문에 일신을 망치고 악귀가 된 하홍약 등 인물의 개성이 두드러진다. 캐릭터를 구성하는 필력이 한 편 만에 급상승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김용 작품 세계 중 가장 기이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 중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금사랑군 하설의다.


금사랑군은 극중 직접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의 입을 빌려서만 설명된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연인 온의만 제외하고 한결같이 공포와 증오에 질려 치를 떤다. 오만하고 극단적인 집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맹목적인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나 보면 족하지, 현실에서 마주치면 즉시 피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금사랑군은 작품 속에서 실제로 등장하지 않고 입으로만 전해진다는 설정만으로도 흥미롭다. 김용도 이러한 설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 <신조협려>와 <소오강호>에 절대강자 독고구패라는 인물을 언급만 함으로써 신비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다만 독고구패는 무공이 강한 것으로만 묘사되지만, 금사랑군은 절륜한 무공은 물론이고 잔인한 성격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자신의 목표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는 선악을 불문하고 가차 없이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사랑군의 이러한 행동에도 공감할 만한 사정이 있다. 도둑떼 온씨 일가에 의해 가문이 망하고 목숨만 겨우 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쉽사리 판단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선악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쁜 짓에도 나름 사정이 있으며 좋은 일에도 숨겨진 의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치고 이러한 배경 설정이 없다면 독자와 평단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나름의 사정을 지닌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해받기 쉽지 않으니 우습기도 하다.


금사랑군은 집념에 차서 자신의 목표를 기관차처럼 밀어붙이지만 결국 목표까지 한 발짝 남겨놓고는 복수를 포기하고 만다. 작중에서는 온의에 대한 애정 때문이지만, 실상 자신을 망가뜨리는 복수심을 더 이상 유지할 힘이 소진되었기 탓일 것이다. 금사랑군은 온의를 죽이는 대신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남겨주고는 자살에 가까운 최후를 맞는다. 이후 기연에 의해 금사랑군의 무덤을 발견한 원승지는 자의반 타의반 금사랑군의 후계자이자 사위 격이 된다. 이러한 전개는 원승지도 금사랑군처럼 원수의 딸과 얽히고 복수에 실패하리라는 암시임은 물론이다.


참고로 역사 속에서 원숭환의 반역죄 처형에 앞장선 사람은 간신 온체인이었다. 따뜻할 ‘온(溫)’ 자를 쓰는 온씨이다. <벽혈검>에 등장하는 온씨 일가도 같은 ‘온’ 자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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