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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Dec 11. 2020

미완의 역사무협소설 <벽혈검碧血劍>(4)

한편 무공을 충분히 수련하고 금사검까지 얻은 원승지는 온청청이라는 짝패이자 연인을 얻어 강호를 가로지른다. 그 와중에 복잡하게 얽힌 무림의 은원관계를 풀어주며 명성을 쌓는다. 그리고 비록 명나라 백성을 엄청나게 학살했지만 성군의 자질을 지닌 홍타이지와 무력만 막강할 뿐 통치자와는 거리가 먼 이자성, 원숭환 처형을 남몰래 후회하는 숭정제의 실체와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한족 중심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벽혈검>이 그리는 숭정제 시대는 기나긴 굴욕을 겪는 분수령이다. 그렇지만 외부 세력의 침입만이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청의 중국 정복에 제법 운이 따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자성과 오삼계의 반목이 명 멸망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일각에서 정덕제, 만력제, 가경제, 천계제를 가리켜 명말 4대 암군이라고 할 정도로 선대 명 황제들은 무능과 부패의 극단을 달렸다. 그렇기에 숭정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잘못했다고 보는 시각도 드물다.


그래도 당시 제갈량에 비견될 만큼 원숭환의 군략이 뛰어났고, 숭정제도 완고하고 답답하기는 해도 이전 암군들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 황제였다. 당시 요동 반도를 점유하고 있던 청은 군사력은 강했지만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해 장기전을 부담스러워했다.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이 점을 설명하면서 잘만 파고들면 몇 년 안에 청을 정벌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열심히 하고 운만 따라준다면 사직의 보존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숭정제는 홀로 적진에 잠입하여 방어 전략을 짤 만큼 유능하고 간이 큰 원숭환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그것도 일반적인 참수가 아니라 일일이 살점을 베어내는 능지형이었다. 내통했다는 죄목이었지만, 설령 내통이 사실이었다 해도 원숭환의 죽음이 명 멸망의 시작이었다는 것이 요새 정설이다. 원숭환을 제외하고는 전쟁을 지휘할 장수도 없었고, 휘하 장군들도 모두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숭정제는 자금성과 청 군대 사이를 막는 유일한 방어벽을 스스로 폭파시켜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왜 원숭환을 죽였을까.


역사 연구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원숭환이 부패를 일삼던 장군 모문룡을 죽인 일로 온체인 일당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당시 원숭환과 청 사이에 잠시 휴전을 논하는 서신이 오갔는데 그것을 빌미 삼아 온체인 일당이 내통으로 참소했다고 한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청은 원숭환이 구축한 방어선을 우회하여 북경 주변을 철저히 약탈하고 양민을 학살했다. 북경성 안은 안전했지만 그 바깥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원숭환 입장에서는 방어선을 지키느라 북경까지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당연히 북경 주변 백성들 사이에서 엄청난 원성이 터져 나왔다. 숭정제 입장에선 이 불만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벽혈검>에서는 홍타이지의 입을 빌려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계교를 써서 내통 누명을 씌워 청에 투항하도록 유도했는데, 어리석은 원숭환이 따르지 않고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엿들은 원승지는 홍타이지에게 덤벼들었다가 자기 아버지 휘하 장군 조대수의 손에 붙잡힌다. 원승지는 명을 배반한 장군 조대수를 꾸짖지만 조대수는 몰래 원승지를 풀어준다.


다른 야사에 따르면, 당시 홍타이지가 명의 환관을 잡아다가 방에 가두고 옆방에서 원숭환이 내통한다는 이야기를 흘렸는데 이 술수는 다름 아닌 삼국지의 조조가 채모, 장윤을 죽인 이야기에서 따 왔으며 심지어 만주족이 한족의 책을 읽고 배워서 써먹었다는 말까지 덧붙여져 있다고 한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민족의 무력을 당해내기 힘든 한족들이 잔머리에 가까운 모략을 써온 일화들이 많다. 당시 청이 한족 문화를 스폰지처럼 흡수했기에 나온 창작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모략에 능한 홍타이지에 비해 숭정제와 원숭환은 지나치게 원리원칙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숭정제는 당장 원숭환을 죽이면 더 이상 나가 싸울 장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극형을 명했다. 원숭환은 그동안 분골쇄신해온 공로를 설마 황제가 몰라줄까 하면서 반신반의하면서 북경에 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 둘 중 한 사람만 좀더 유연했거나 결정을 미뤘다면 그러한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용은 <벽혈검>에 숭정제의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집어 넣었다. 다름 아닌 미녀 진원원에 대한 이야기다. 숭정제는 궁에 온 진원원이 마음에 들어 사흘 동안 같이 지냈다. 그러나 이후 숭정제는 진원원과 같이 있으면 황제의 직무에 충실하기 힘들다며 내쫓아 버렸다. 그 후 진원원은 오삼계의 첩이 되었다가 북경을 함락시킨 이자성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오삼계가 이자성에게 투항하려다가 자기 첩을 빼앗아갔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나라가 망한 와중에 진원원 때문에 싸움을 벌인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청은 대거 남하하여 북경을 점령했다. 이자성은 도망치고 오삼계는 청의 신하가 되었다.


만약 민간전설대로 진원원이 오삼계와 이자성 분열의 원인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숭정제가 조금 유연성을 발휘하여 진원원을 그대로 궁에 두었다면 오삼계와 이자성이 맞붙어 싸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둘의 분열은 진원원 한 명 때문이 아니다. 이자성은 민심을 완전히 잃었고, 오삼계는 대업을 이루기에는 틀린 인물이었다. 진원원에 대한 이야기를 빌어 김용은 숭정제의 근시안적인 사고를 비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통치 과정에서 아무리 선의로 한 행동이라도 정반대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원원은 아주 인기 있는 기녀였는데, 후궁의 추천을 받아 입궁했지만 숭정제가 너무 바빠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금방 출궁했다고 한다. 이후 진원원은 오삼계의 첩이 되었다가 이자성 수하 장군에게 붙잡혔다. 원래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항복하려고 했지만 진원원이 포로가 되었고 또 자기 아버지가 얻어맞았다는 말이 분개하여 청에 의탁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이후 진원원은 오삼계와 같이 운남에서 살았지만 이후 오삼계가 청에 반란을 일으키자 몸을 피해 출가했다. 그렇지만 청 장군이 쫓아와 물건을 약탈하고 강간하려 들자 더 이상 굴욕을 당하기 원치 않는다며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최고 권력자들 사이를 오갔지만 그 중 아무도 진원원 한 명의 안전을 지켜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원원 뿐만이 아니라 당시 전란에 휘말린 백성들이 다들 그런 처지였다.


김용은 <벽혈검>에 실제 인물 외에도 역사적 배경을 제법 차용했다. 그 중 하나는 원승지가 향할 마음을 먹는 발니국이다. 발니국에 살던 중국인 장조당은 스승의 권유를 받아 명에 과거를 보러 간다. 장조당은 학문과 문화가 꽃피는 유교 종주국을 볼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그를 맞은 것은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과 부패한 관리, 분노한 도둑떼 뿐이었다. 다행히 협객을 만나 위기를 넘긴 장조당은 원승지를 자기 나라로 청한다. 원승지도 이자성에게 마음이 떠난 터라 발니국행을 결심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를 설득하러 가는 것으로 작품이 끝난다. 속 좁고 화 잘 내는 이자성이 원승지를 과연 살려뒀을지 의문이지만.


여기서 발니국이란 지금의 브루나이로 명대 유명했던 선단 정화가 머물렀던 나라이다. 현재 중국에서 정화는 세계 진출의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처음에는 영락제가 건문제를 추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영락제는 건문제의 삼촌이었는데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의 제위를 찬탈한 뒤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어마어마한 궁궐 자금성을 지었다. 건문제는 삼촌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갔는데, 그를 찾기 위해 구축된 거대한 규모의 선단이 바로 정화이다. 정화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기록도 많이 남겼다. 하지만 건문제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1405년 브루나이에 도착한 정화는 마자파힛 왕국의 기습을 받아 170명을 잃었다. 그러자 정화는 대군을 상륙시켰고, 마자파잇 국왕에게 보상금과 조공 약속을 받아냈다. 이를 눈여겨본 이웃 나라 브루나이 왕국의 술탄 압둘 마지드 하산은 정화를 잘 대접하여 명을 방문할 허가를 받았다. 힘센 나라 명을 이용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자파힛 왕국을 누를 의도였다. 술탄 하산은 명 복건성 관리들과 만나고 돌아온 뒤 정화 2차 원정대에 참여, 당시 명의 수도였던 남경에 도착했다. 당시 남경에는 명의 힘을 빌리려는 아시아 각국의 고위직 관리들이 우글거렸다. 그러나 술탄 하산은 남경 도착 후 불과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


브루나이 국왕 계보에는 그의 이름이 없지만 명은 술탄 하산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나아가 이쪽에 충성하면 확실히 챙겨준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이국땅에서 객사한 술탄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고 왕묘도 지었다. 그 뿐만 아니라 충성을 치하하는 비석과 기념문은 물론 황제의 것보다 1쌍 모자란 5쌍의 석상까지 만들어 주었다. 황제국의 권위로 발니국의 국왕임을 인증해준 것이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남경 남쪽 오구산 기슭에 있다. 바로 발니국왕묘다.


한동안 잊혔던 발니국왕묘는 기록에만 남아 있다가 1958년 재발견되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발니국왕묘를 단장하고 브루나이 공주 방문 기념으로 2300만 위안(약 40억 원)을 들여 브루나이풍 정원을 조성하기도 했다. 천연자원이 많은 브루나이와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다. 브루나이도 화교가 많은 데다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군사력이 약해 중국의 뒷배가 필요한 사정이다. 몇 백 년 전의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역시 정권은 바뀌어도 지정학은 영원하다는 말을 곱씹게 된다.


<벽혈검>은 이러한 발니국왕묘의 유래를 전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술탄 하산이 죽은 이후에도 명과 발니국의 교류는 꾸준히 이어졌고 명은 발니국에 나독(那督)이라는 관리를 계속 파견했다. 나독 벼슬은 복건성 장주 장씨들이 대대로 세습했는데, 극중 장조당은 이 장씨 집안 아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명이 발니국에 주재 대사를 보냈고 장씨 가문이 대사직을 세습했던 셈이다. 장조당은 발니국 화교로 지내다가 중국에 과거를 보러 갔다. 급제하여 진사나 거인이 되어 발니국에 돌아가면 더욱 높은 명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단순히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한국 화교들도 평소 한국에 살다가도 대학만큼은 대만 등으로 유학을 가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국경의 문턱이 훨씬 낮았던 옛날, 화교 청년들이 학문과 문화가 꽃피는 중국의 진면모를 보러 등짐을 짊어지고 멀고 위험한 길을 떠났던 모습이 떠오른다. 과연 그들의 기대는 충족되었을까? 아니면 장조당처럼 실망에 차서 돌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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