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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Dec 11. 2020

미완의 역사무협소설 <벽혈검碧血劍>(5)

진가락과 그의 동지들이 벌이는 반청복명 활동이 주가 되는 전작 <서검은구록>과 달리 <벽혈검>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원승지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그의 모험을 따라가는 줄거리 구조가 확립된 것이다. 그렇지만 원승지의 모험들이 직접적인 반청복명 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에피소드 별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보면 원숭환의 죽음과 반청복명 활동, 그리고 원승지의 모험이 한데 통합되지 못하고 따로 움직이는 인상이다.


사실 역사를 토대로 했다는 점을 제쳐두면 <벽혈검>은 정말 재미있다. 금사랑군에 얽힌 무서운 과거가 조금씩 밝혀지는 과정과 ‘츤데레’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주는 온청청과 밀고 당기는 장난 같은 연애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보는 독자에 따라서 ‘대체 원승지는 아버지 복수를 언제 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거나, ‘저렇게 하릴없이 돌아다닐 시간에 어서 이자성군에 들어가서 시원하게 오랑캐를 쳐부수지 않고 무얼 하는 게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벽혈검>이 선택한 역사적 배경이 워낙 수많은 의문과 아쉬움이 남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적으로 보면 <벽혈검>은 전작 <서검은구록>에 비해 캐릭터 다양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김용 작품 세계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금사랑군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 개성 있는 인물들과 줄거리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따로 움직이는 것이 단점이다. 역사소설을 쓰기도 어려운데, 그것을 토대로 무협소설을 쓰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김용도 아쉬웠던지 두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5분의 1 정도 분량을 늘리고,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녹정기>에 <벽혈검>의 설정을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것도 아쉬워 원숭환의 전기를 따로 썼다. 그걸로 명청 교체기에 대한 아쉬움이 갈무리되었을까. 개인적으로 <벽혈검>의 제목에 쓰인 글자에 그 아쉬움이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푸른 벽(碧), 피 혈(血) 두 글자가 흩어지지 않는 충신의 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벽혈검>


1956년에 연재 완료된 <벽혈검>은 2년 후 흑백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로 홍콩 배우 조달화가 원승지를 맡았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1936년부터 1997년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다. 그 뒤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김용 팬들 가운데 <벽혈검>은 영상화 원작으로 인기가 높은 편이다. 명청 교체기가 배경이라 전쟁 장면도 대거 들어가는데다 복수가 겹치는 스토리에 시각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캐릭터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원승지가 금사검을 사용하거나 외팔이 고수 하철수가 활약하는 장면은 영상화되었을 때 만만치 않은 볼거리다. 그리고 숭정제가 처자를 죽이고 자살하는 장면은 비단 중국인만이 아니라 전란으로 나라를 잃어 본 역사적 경험이 있다면 가슴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


홍콩 드라마 명가 TVB가 이런 원작을 놓칠 리 없어서, 1985년 방송국 차원에서 밀어주던 황일화와 묘교위를 내세워 20부작으로 만들었다. 원작에 충실한 재미가 있다는 평이다. 지금도 김용 팬들은 김용 드라마라면 TVB를 쳐주는 경향이 있다. 대개 섣부른 각색 없이 원작을 따라 충실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1993년에는 한국에도 팬이 많았던 정이건 주연으로 <금사랑군>이 만들어졌다. 일종의 외전 격이지만 원작과 거의 무관하게 진행된다는 평이 우세하다. 2007년에는 김용 작품의 분위기를 잘 살린다는 평을 받는 장기중 감독의 <벽혈검>이 제작되었다. 한국에도 수입되어 방영되었는데, 주인공 원승지는 물론 온청청과 하철수 등 캐릭터를 잘 살려내어 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원승지의 발니국행 등 잔가지 스토리는 과감히 쳐내고 쓰러져가는 명의 앞날을 고민하는 숭정제의 비중을 살리는 등 나름 각색을 했다. 하지만 <벽혈검>의 뿌리를 이루는 문제의식, 즉 원숭환의 억울한 죽음과 이자성 반란 등은 비중이 축소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통일되어 다민족 국가가 된 현대 중국에서 만주족에 맞서 싸우던 원숭환은 그다지 꺼내고 싶지 않은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각색에 개방적이었다는 김용은 원숭환의 존재가 사라진 드라마 <벽혈검>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새삼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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