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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Mar 24. 2021

<사조영웅전>-현대의 동화, 무협소설(2)

전근대 시대의 근대적 로맨스


<사조영웅전>은 동화적인 스토리를 도입하는 한편 근대적인 로맨스를 끌어들였다. 이전까지 중국 전통 문학에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 되는 예가 많지 않았다. 예를 들면 조선의 <춘향전>에 비견되는 중국의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 <양산백과 축영태>는 비극으로 끝맺는다. 축영태는 양산백이 마음에 들어 남장을 하고 서당에 들어간다. 두 사람은 공부를 하며 서로 친해지고, 축영태는 양산백에게 시를 인용하여 우회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축영태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게 되자 양산백은 실망하여 자살하고 만다. 혼인길에 오른 축영태는 잠시 그의 무덤 앞에 내리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 앞에 서자 무덤이 갈라지고, 축영태는 신부 옷을 입은 채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깊이 사랑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같이 죽음을 선택하거나, 한 사람은 죽고 남은 사람은 영원한 그리움 속에 빠지는 것이 중국 전통 문학 속의 전형적인 로맨스였다. 김용의 이전 작품도 비슷한 흐름 위에 놓여 있서, <서검은구록>과 <벽혈검>의 로맨스는 참담할 정도로 비극적으로 끝나버린다. 그런 면에서 두 작품은 중국 전통 문학의 흐름과 일정 부분 연결된다.


그렇지만 <사조영웅전>의 곽정과 황용의 사랑은  한두 번 가로막힌다고 좌절되지 않는다. 심지어 두 사람의 관계는 곽정이 금과옥조로 삼는 충효와 의리 문제와 정면충돌하지만 결국 각고의 노력으로 돌파된다. 작품 전체에서 곽정이 웃어른 말씀에 단 한 번 반항하는 대목도 강남칠괴가 황용과 헤어지라고 분부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곽정은 황용과의 약속이 소중하다고 잘라 말하고, 그 모습을 지켜본 황용은 곽정을 소홍마에 태워 도망친다. ‘남자’가 ‘여자’를 납치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 ‘남성’을 낚아채는 것이다. 근대문학의 주요 요소인 개인의 욕망과 자유가 무협 세계의 중심으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성역할의 전복을 통해 김용의 소설은 근대적 서사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시작한다.


곽정과 황용의 관계에서도 여성이 주도권을 쥔다. 먼저 혼인하자고 제안하는 쪽도 황용이고. 매사가 그녀의 뜻대로 결정된다. 워낙 황용이 똑똑하고 추진력도 좋아서 곽정이 할 일이 별로 없을 정도다. 곽정이 단호하게 황용에게 지시하는 경우는 인명을 보호하거나 금 왕조에 맞서는 일뿐이다.


기실 곽정의 주된 고민이란 황용과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는 충효의 실현이다. 그에 비해 황용이 벌이는 모든 일들은 그저 곽정 오빠가 기뻐한다면 뭐든 한다는 애정의 발로처럼 묘사된다. 10대 중반 사춘기인 황용의 민족의식은 그야말로 상식적인 수준이서, 그녀에게는 민족 배신자의 정치적 행위들은 선악이나 의협의 관점으로 치환되거나 이해된다. 여성이나 연소자는 민족 간 투쟁 내지 국제 정치라는 거대 현상에 대해 흥미나 이해가 부족하고, 주체적인 의견도 적다는 선입견이 포착되는 부분이다. 또다른 여주인공 격인 목염자는 민족 의식이 확고함에도 불구하고 양강을 떠나지 못하다가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역시 여성은 국가나 명분보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전근대적 사고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조영웅전> 로맨스의 근대성은 이 지점에서 멈추고 만다. 젊은이들의 사랑이나 부부 관계조차 사회정치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민족과 국가, 이민족과의 투쟁 같은 거대 담론으로 뛰어드는 것은 주로 남성이고, 여성은 그런 문제에 비교적 관심이 적은 대신 연정에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은 막상 본인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전근대적 가부장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조영웅전>의 속편 격인 <신조협려>에서도 황용은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몰두하는 전형적인 주부로 그려지며, 개방 방주로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연애 중에는 관계를 리드하는 주도적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는 전통적인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다. 실제로 근대적 로맨스와 전근대적 부부관계 사이의 모순은 당시 신여성들의 고민거리였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근대적일 수 있지만, 정치사회적 환경은 여전히 전근대적 관성을 고수하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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