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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Mar 29. 2021

<사조영웅전> 현대의 동화, 무협소설(3)

그렇기에 <사조영웅전> 로맨스의 근대성은 이 지점에서 멈추고 만다. 젊은이들의 사랑이나 부부 관계조차 사회정치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민족과 국가, 이민족과의 투쟁 같은 거대 담론으로 뛰어드는 것은 주로 남성이고, 여성은 그런 문제에 비교적 관심이 적은 대신 연정에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은 막상 본인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전근대적 가부장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조영웅전>의 속편 격인 <신조협려>에서도 황용은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몰두하는 전형적인 주부로 그려지며, 개방 방주로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연애 중에는 관계를 리드하는 주도적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는 전통적인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다. 실제로 근대적 로맨스와 전근대적 부부관계 사이의 모순은 당시 신여성들의 고민거리였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근대적일 수 있지만, 정치사회적 환경은 여전히 전근대적 관성을 고수하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조영웅전>은 전통적인 중국 문학의 로맨스보다 분명 진일보했다. 작품에서 곽정은 황용을 배우자로 택하는 이유를 사랑이나 정이 아니라 “황용과 맺은 약속”이라고 꼭 집어 말한다. 어느 문명권이건 혼인은 계약의 속성을 지닌다. 설령 사랑이 식는다 해도 그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 비록 곽정이 남장을 한 황용이 여자인 줄도 모르고 “(형으로서) 평생을 돌보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튼 곽정에게 약속은 약속인 것이다. 똑똑한 황용은 그 약속을 받자마자 남장을 벗어던지고 곽정과 연인 관계를 시작한다. 그들의 관계는 <양산백과 축영태>의 비극적인 결말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 생각해보자. 아무리 빙빙 돌려 말해도 못 알아듣는 양산백을 향해 축영태가 답답해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말했다면 그토록 슬프게 결말이 났을까. “이 멍청아! 나는 여자고 널 사랑해서 남장을 하고 여기까지 왔다고.” 황용은 전근대 시대의 축영태처럼 슬픔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 곽정이 자신을 버렸을 때조차도 용기를 잃지 않고 사랑을 쟁취한다. 김용이 살았던 민국 시대의 자기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한 신여성들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다.


<사조영웅전>의 여성 캐릭터는 주도적이고 활기차며 때로는 위협적이다. 심지어 가부장제가 깊숙이 관철되는 궁중의 여인인 영고조차 사생자를 낳은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조영웅전> 속 로맨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인생에서 사랑은 충효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완성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연애와 사랑은 필수적이다. 개인의 독립은 연애를 통해 시작되고, 수많은 장애를 넘으며 사랑을 지키는 과정에서 인격이 성숙한다. 그 인격을 토대로 새로운 가족이 세워지는것이다. 연애도 사랑도 결혼도 포기한 1인 가구의 시대에서 어찌 보면 구식 이야기일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지금도 수많은 매체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 대중의 공감을 산다. 외로울수록 진정한 사랑은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사와 야사가 이루는 하나의 세계


판타지 문학을 즐기는 독자들이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생생한 캐릭터, 시각적인 이미지와 묘사 못지않게 중요하게 치는 요소가 있다. 바로 세계관이다. 판타지 소설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아주 재미있지 않지만 세계관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읽는다”는 리뷰를 볼 수 있다.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은 일반적인 소설의 배경이나 설정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다른 점이라면 일반 소설의 배경과 설정은 현실의 개연성을 갖추어야 하지만,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이야말로 작가의 개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진지한 판타지 독자들은 판타지의 아버지 격으로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을 친다. 이들은 톨킨이 작품 집필보다 세계관 구축에 시간이 더 걸렸을 거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톨킨은 작품에 쓰기 위해 인공 언어를 따로 만들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구축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렵다. 하지만 습작삼아 단편 소설 한두 편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다. 설정만 잘 해 놓으면 집필은 큰 문제 없이 굴러간다는 것을 말이다. 김용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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