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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May 28. 2021

왜 홀로코스트는 거짓말이 되었나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충실히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작과 생존자 증언, 기록을 토대로 고증했고 수송 과정과 강제노동, 학살 과정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직도 유대인 차별이 암암리에 있는 미국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인권의 문제를 제기한 작품으로 꼽힌다. 스필버그 감독이 <쉰들러 리스트>를 사실적으로 만든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였다. "저 영화 속의 모습은 진짜다."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이 재산을 뺏기고 굶어 죽어가는 것도 가스실로 밀려들어가는 것도 모두 진실이다. 허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것은 진실'임을 효과적으로 설득한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감독의 의도와 정반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없는 사실을 꾸며내어 만드는 것도 가능한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스필버그는 영화계에 특수효과를 널리 퍼뜨린 감독들 중 한 명이다. 특수효과의 힘은 세상에 없는 것도 만들어내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이것이 유대인의 세계 정복 음모론과 결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낳았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스필버그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영화 특수효과를 동원하여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세계인은 그 영화에 세뇌되어 유대인이 600만 명이나 죽었다는 거짓말에 속고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서사적 매체 - 영화, 드라마 등 - 로 재연하는 것은 이렇게 양날의 검이 된다. 한쪽은 설득되지만, 한쪽은 그 매체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차피 다 꾸며서 보여줘도 다 진짜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구분을 한단 말이냐?) 서사화에는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다. 어떤 부분들, 어떤 인물들은 잘려나가거나 배제된다. 여성, 비백인, 아동, 성소수자, 이민자의 관점과 권익 등이 잘려나가 온 역사야말로 유구하지 않은가. 이렇게 정치적인 문제로 잘라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해당 주장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일간에 교착된 위안부 문제에서 국제관계를 걷어내면 결국은 이 문제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서사를 만드는 창작자들만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게 아니다. 역사가들도 마찬가지다. 특정 주제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주제들은 덜 중요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는 한 작품으로만 해결될 수 없다. 그렇기에 <쉰들러 리스트>를 보았다면, 반드시 끌로드 란쯔만의 <쇼아>를 봐야만 한다. <쇼아>에는 재연 장면이 없다. 따라갈만한 서사도 없으며, 생존자와 나치의 증언으로 진행된다. 같은 주제에 대하여 생존자와 나치의 증언이 번갈아 보여진다. 관객들이 그 증언들을 모두 이해할 만한 시점에서 미니어처가 보여진다. 그 미니어처를 보는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아무리 홀로코스트에 대해 공부해도 살아 있는 자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죽은 자는 침묵한다.'


죽은 자만이 본 것. 이 존재를 인식하면 역사를 매체로 서사화하는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느 쪽이 거짓말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알 수 없음'을 선언할 때. 왜냐하면 산 자는 죽은 자만이 본 것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정상이다. 세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다. 인간의 무지는 정상이다. 상반되는 두 입장이 끝없이 부딪치다 보면 둘 중 하나가 "그건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펴는 순간이 온다. 그 불가지론은 인간 존재의 겸손이며, 그 겸손이 인간을 치명적인 오류에서 지켜준다. 모른다는 것에는 진실로 나아갈 가능성이 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에 음모론이 있다. 음모론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내가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 - 나는 똑똑하며 속지 않는다는 자신감 - 을 깔고 있다. 그것도 아주 쉽게. 음모론은 노력을 결여하며 인간의 한계를 부정한다. 게다가 나보다 잘 먹고 잘 살며 출세한 인간 - 정치인, 지식인, 연예인 - 이 실은 아주 부정의하며 나쁜 것들이고 내가 취해야 할 자원들을 부당하게 독점한다는 불만을 만족시켜준다. 이 착각은 일부 정치인들에 적용하면 일부 진실이기도 하기에, 음모론은 더욱 힘을 얻는다. 음모론만큼 오만과 게으름을 쉽게 충족시켜주는 것도 드물다. (역설적으로 음모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 가짜뉴스 유튜버 등 - 은 매우 부지런하고 상상력이 충만하며 그 댓가로 상당한 돈을 번다.)


그렇지만 음모론이 나쁘다는 결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로 만들어 매체화하기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영화와 드라마 등 서사 매체의 부모 격인 소설 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실은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허구가 된다. '2021년 5월 28일 금요일 오후 누군가 책상에 앉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는 문장 자체는 사실이지만, 같은 문장이 소설에 들어가는 순간 허구가 된다. 그게 소설의 약속이다. 영화도 드라마도 같은 약속을 지닌다. 그렇기에 이러한 서사 매체가 진실을 전하는 역할에 나설 때. 바꾸어 말해 시간이 너무 흘러 매체로밖에 진실을 전할 수 없는 시절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사람들이 역사를 이야기로만 소비할 때... 서사 매체가 갖고 있는 약속의 벽은 점점 낮아지고 살짝 발을 들기만 하면 될 정도가 되었다. 이제 한 발짝만 나가면 된다. 


아마도 지금은 수십 킬로미터는 달려나가버린 듯하다. 사람들이 매체로밖에 진실을 접하지 못할 때 비로소 진실과 허구의 벽은 사라져 버리고, 고립된 사람들은 '내가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한계는 무한하여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상식까지 쉽게 무너뜨려 버린다. 영상 속의 인간과 실제 인간은 다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영상보다 실제가 못하면 '사실성이 부족하다'며 영상을 불신했다. 지금 사람들은 실제가 영상을 따라잡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싫어요'를 누르거나 악플을 남긴다. 왜 그러한가? 해답은 간단하다. 그래도 나에게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게으름은 늘 벌을 받아왔다. (자연의 섭리에 의해!) 지금처럼 오만과 나태가 득세한 시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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