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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Jul 04. 2021

[판타지 단편동화] 까마귀 엄마 이야기(2)

“조용히 해, 이 자식아! 신경통 약으로 달여버릴 테다.”

“캬옹! 이 나쁜 인간들아! 내 생선 건드리지 마!”

“네 생선은 줘도 안 먹을 거야. 이 애한테 빼앗아간 물건이나 돌려줘.”

“야옹야옹, 금화는 벌써 생선으로 바꿨다고! 그 생선은 내 거야!”

“금화라고? 네가 이 애한테 빼앗아간 게 금화라고?”

“그래! 금화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생선을 사 먹겠어?”

청년은 깜짝 놀라서 소녀를 돌아보았습니다. 포대나 다름없는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다니는 소녀가 금화를 가졌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자루 속 고양이를 주먹으로 콱 쥐어박았습니다.

“이 너구리 새끼, 거짓말하면 가죽을 벗겨 주머니로 만들 테다.”

“거짓말 아니야. 구멍 속에 생선이 얼마나 많은지 보라고.”

청년은 다시 자루를 쿡 질렀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힘없이 말했습니다.

“오빠, 저 고양이 말이 맞아요.”

“고양이가 훔쳐간 게 금화라고?”

“네.”

청년이 자루를 살짝 열자 고양이가 뛰어나왔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손에 뒷덜미를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고양이는 네 발을 버둥거렸습니다. 청년은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너, 또 이 애 물건을 뺏어가거나 괴롭히면 아주 혼날 줄 알아!”

청년은 고양이를 놓아주었습니다. 고양이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총알처럼 숲을 가로질러 사라져 버렸습니다. 청년이 말했습니다.

“아가야, 고양이가 빼앗아갔다는 물건은 못 찾겠구나. 미안해.”

청년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금화를 가졌다는 아이가 왜 이렇게 깡마르고 창백하고 누더기에 맨발로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고양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소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망한 나머지 눈망울에 눈물이 고인 소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소녀는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금화를 찾아서 청년에게 꼭 주고 싶었습니다. 청년의 어머니가 건강해지시면 청년이 소녀를 귀여워해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금화가 없으면 약을 못 사고, 청년의 어머니도 나으실 수 없습니다. 소녀는 슬프고 실망스러워서 눈물이 계속 났습니다. 청년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청년은 소녀가 눈물을 흘리자 고양이가 빼앗아갔다는 물건을 못 찾아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청년은 소녀의 엉킨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아가야, 울지 말렴. 오빠가 애썼지만 물건을 찾지 못했구나. 다음번에 맛있는 걸 사줄게.”

소녀는 청년이 쓰다듬어주자 더욱 눈물이 났습니다. 소녀의 눈물이 그치지 않자 청년은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계속 달래주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소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머리에서 손을 떼고 조금 물러섰습니다.

“자 아가야, 이제 오빠는 가야 해. 어머니가 편찮으시거든. 다음에 보자, 안녕?”

청년은 갈퀴와 그물을 챙겼습니다. 집에 가려는 것 같았습니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여기서 청년을 놓치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았습니다. 지금 청년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심장이 가슴을 터뜨릴 기세로 뛰었습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청년을 붙잡기 위해 무어라고 말을 해야 했지만 목구멍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심장이 청년을 향해 튀어나오려는 듯 가슴뼈에 머리를 들이받았습니다.

“오빠?”

드디어 소리가 나왔습니다. 벌써 저만치 가고 있던 청년이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돌아보았습니다.

“응? 아가야?”

“아니요, 아니 …”

소녀는 간신히 목소리 대신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눌렀습니다.

“우리 …, 우리 집에 가면요.”

“집? 우리 집? 오빠네 집 말이니?”

“아니요. 아니.”

소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고 말했습니다.

“우리 집이요. 제가 사는 집이요. 거기에 같이 가요.”

“너희 집 말이니? 저 숲 너머에? 거긴 아무도 살지 않는데.”

“아니요. 저 혼자 살아요.”

소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거짓말이에요. 엄마도 가끔 와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너희 집에 가자고? 거기에는 왜?”

“… 가면 알게 돼요.”

청년은 망설였습니다. 숲 너머에 가본 적은 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숲 너머에 산다는 소녀의 집이 어디인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청년은 소녀가 또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래, 너희 집에 가보자.”

소녀는 너무 기뻐서 청년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숲을 벗어나자 안개가 끼어 있었습니다. 풀밭의 잡초는 이미 저녁 이슬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젖은 맨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청년을 끌고 갔습니다. 청년은 풀밭 한가운데에 오자 멈춰 섰습니다.

“어디에 너희 집이 있니?”

소녀는 풀밭 저편을 가리켰습니다.

“저 아래요.”

“저 아래? 저긴 절벽 밑인데?”

“절벽 아래에 있어요.”

“뭐? 절벽 아래?”

소녀는 풀밭 끝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납작 엎드리더니 동굴로 내려가는 굵은 덩굴줄기를 끌어올려 청년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청년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걸 타고 아래에서 올라온 거니?”

“네. 튼튼해요.”

“이걸 타고 내려가서 집에 간다는 거니?”

"아래에 동굴이 있어요. 거기 살아요."

"도대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산다는 거니?”

청년은 혀를 찼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곳에서 소녀가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위험한 곳에 혼자 살고 있다니 이번에는 소녀가 정말로 불쌍해졌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면 마을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소녀는 덩굴줄기를 잡고 내려갔습니다. 청년도 덩굴을 잡고 내려갔습니다. 오래 묵은 덩굴줄기는 아주 굵고 튼튼했습니다. 그래서 덩치 큰 청년도 걱정 없이 동굴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동굴로 들어선 청년은 입을 딱 벌렸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보물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해적이나 귀족의 보물섬에 온 것 같았습니다. 여기저기 금화가 쌓여 있었고 붉은 루비와 녹색 에메랄드가 광채를 번쩍였습니다. 동글동글한 진주 목걸이가 밧줄처럼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수정 거울과 은빗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소녀가 매일 아침 머리를 빗으려고 애쓸 때마다 쓰는 물건이었습니다.

소녀는 청년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었습니다. 소녀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이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소녀는 일단 안심했습니다.

“저어, 오빠, 어머니 병은 …”

“아가야.”

“네?”

“고양이가 금화를 빼앗아갔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구나.”

“네. 거짓말 아니었어요.”

“나한테 이걸 보여주려고 같이 오자고 한 거니?”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청년이 다시 물었습니다.

“이 보물은 전부 누구 것이니?”

“… 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말하기가 좀 난처했습니다. 물론 보물은 전부 까마귀 엄마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입버릇처럼 자신이 죽고 나면 전부 소녀의 것이 된다고 말했고, 소녀도 동굴에 살면서 열심히 보물을 지켰으니 대답하기 좀 곤란했습니다. 보물이 엄마의 것도 되고 소녀의 것도 되는 것 같았거든요.

“아가야, 이 보물이 어디서 났니? 누가 훔쳐온 물건이니?”

“…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소녀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사실 까마귀 엄마는 보물을 가져와서 보여주기만 했지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는지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궁금해진 소녀가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엄마는 ‘너는 몰라도 돼, 보물만 잘 지키면 돼’라고만 대답할 뿐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태어났을 때 이 보물도 같이 태어난 것은 아닐 테고. 너도 잘 모르겠다고만 하니 이상하구나.”

소녀는 청년의 말을 듣자 이 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정말 이 보물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혹시 엄마가 훔쳐온 것은 아닐까? 아니야, 나를 돌봐주기 위해 엄마가 열심히 일해서 가져온 걸 거야. 엄마는 내가 먹을 밥도 가져오시는 걸.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소녀는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가져오시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지키고요. 저는 여기서 이걸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청년은 기가 차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네가 이 보물을 지킨다고? 이 아무도 없는 절벽에서? 아가야, 넌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왜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데요?”

“아이고, 아가야, 여긴 먹을 게 아무것도 없잖니. 아궁이도 없고 그릇도 없어. 매일 요리를 해서 밥을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살지. 물 길어올 우물도 없으니 세수도 못 하지, 청소도 못 하지. 얼마나 지저분하니. 모르긴 몰라도 이 금화 밑에는 엄청나게 먼지가 쌓여 있을 거야. 아마 박쥐 시체도 나올 거다.”

“그래도 저는 여기 있어야 돼요.”

“안 돼, 여기 있으면 병 걸려서 죽어요! 아가야, 황금을 쌀 대신 먹고살 수는 없단다. 금화나 은화를 밥 대신 먹는 사람 얘기 들어봤니? 진주로 얼굴을 비비면 깨끗해지니? 저기 빗이 있지만 먼저 머리를 감아야 빗질을 할 게 아니겠니. 자, 오빠랑 여길 나가자. 보물이 네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소녀는 청년이 같이 가자고 말해주자 내심 기뻤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와서 소녀를 못 찾으면 무척 슬퍼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소녀는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

소녀는 답답해서 숨이 가빠왔습니다. 청년을 따라 동굴을 나가고 싶었습니다. 매일 밝은 햇빛을 보며 나비와 뛰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소녀가 동굴 속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일하게 만나는 것이 까마귀 엄마였습니다. 소녀는 엄마를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가야, 어서 가자.”

“그래도 …, 엄마가 …”

“엄마가? 엄마가 찾아온다고?”

“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청년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소녀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습니다. 어둡고 지저분한 동굴에 아이를 처박아 둔 소녀의 엄마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런 엄마라면 당장 버리고 떠나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망설이는 소녀를 무작정 끌고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 같이 엄마를 기다려 보자.”

청년은 동굴 바닥에 앉았습니다. 소녀의 엄마라는 여자가 찾아오면 호되게 야단을 쳐 줄 요량이었습니다. 이렇게 더럽고 끔찍한 곳에 자식을 내팽개쳐 두고 보물만 잔뜩 모으면 될 법한 일이냐고 호통을 쳐 줄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한편 소녀는 청년이 같이 있어주어서 눈물이 나게 기뻤습니다. 까마귀 엄마 말고 누군가 동굴에 찾아와 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너무나 외로워서 그 사나운 고양이마저 보고 싶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소녀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만약 엄마가 돌아오면 얼마나 화를 낼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엄마가 돌아오면 어떡하지? 엄청나게 화를 내실 텐데. 누굴 데려오는 건 물론이고 동굴이 어디 있는지도 아무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소녀는 슬며시 청년을 훔쳐보았습니다.

‘엄마랑 마주쳐서 큰일 나기 전에 가라고 해야 되나? 가라고 하면 오빠가 나에게 동굴에 있지 말고 같이 가자고 하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여기서 엄마를 기다려야 해. 역시 오빠만 가라고 해야 될 것 같아. 그런데 가라고 하기 싫어.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아. 배도 안 고프고 춥지도 않아.’

고민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해가 기울었습니다. 청년은 가끔 목을 내밀어 동굴 바깥을 살폈지만 사람이 내려오는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집에 가야 했지만 소녀를 놔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청년은 초조해졌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아가야, 오늘은 엄마가 안 오니?”

“네.”

“안 온다고? 그럼 너 혼자 동굴에 있니?”

“엄마는 아주 가끔 오세요.”

“아주 가끔 온다고?”

“네,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음식 가지고 오세요. 안 오실 땐 저 혼자 있어요.”

청년은 도리질을 쳤습니다.

“정말 안 되겠구나. 엄마가 안 오신다니, 우리 먼저 가자꾸나. 여긴 하루만 있어도 병이 나겠다.”

그때 바깥에서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발톱으로 바위를 긁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곧이어 까악, 깍 하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까마귀 엄마가 온 것입니다.

“까악! 까아악! 내 보물! 내 아기! 잘 있었니?”

까마귀 엄마가 커다랗고 시커먼 날개를 접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늘도 보물을 물어왔는지 부리에 황금 목걸이를 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바닥에서 일어섰습니다. 청년도 놀라 일어섰습니다.

“엄마!”

“그래! 내 아기!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지? 누구야! 아가야, 어떻게 된 거니! 왜 이 인간이 동굴에 있는 거야? 보물을 훔치러 왔구나!”

“아니에요, 엄마. 제가 오라고 했어요.”

“뭐? 네가 오라고 했다고?”

까마귀 엄마는 날개를 좍 펼치고 홰를 쳤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며 깃털이 사방으로 날렸습니다. 소녀와 청년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머리를 들자 새까만 깃털들이 휘황찬란한 황금 더미 위에 먹물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소녀는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이 나쁜 놈! 내 보물을 훔치러 왔지? 당장 나가!”

“아니에요, 엄마, 화내지 마세요.”

“아니라니! 내 아기를 속여서 여길 알아냈구나! 당장 나가! 나가라고!”

까마귀 엄마는 다시 날개를 펼치더니 거대한 목소리를 뽑아내었습니다. 까악, 깍 하는 소리가 동굴 바깥 절벽 저편까지 메아리쳤습니다. 청년은 공포에 질려 물러섰습니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엄마와 청년 사이를 막아섰지만 엄마가 휘두른 부리에 맞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도둑놈, 내가 평생 모은 보물 훔쳐가는 나쁜 놈! 당장 나가!”

“아가야, 이 까마귀가 네 엄마라고?”

청년은 뒷걸음질 치면서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얻어맞은 볼을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까마귀 엄마는 청년을 마구 쪼아대고, 발톱으로 할퀴고 부리와 날개로 번갈아 후려쳤습니다. 청년은 몸집이 컸지만 분노에 넘쳐 덤비는 거대한 까마귀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까마귀 엄마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소녀보다 훨씬 힘이 세었습니다. 청년은 얼굴을 가리고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중심을 잃고 동굴 바깥으로 밀려나갔습니다. 까마귀는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리는 청년을 마지막으로 후려쳤습니다. 소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안개 낀 절벽 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안 돼 …, 안 돼에 …”

소녀는 동굴 끝에 엎드렸습니다. 청년이 떨어지면서 놓친 덩굴줄기가 시계추처럼 흔들렸습니다. 절벽 아래는 안개가 끼어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 돼 …”

소녀는 절벽 아래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축축한 안개가 손바닥을 적셔왔습니다. 안개는 어느새 이슬비가 되었고 점점 빗방울이 굵어졌습니다. 소녀는 손을 내민 채 눈물만 흘렸습니다. 소녀의 눈물방울이 절벽 아래로 빗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무엇인가 소녀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습니다. 거대한 까마귀였습니다. 까마귀는 마치 독수리처럼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소녀는 까마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까마귀는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면서 소녀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날아다니다가 이윽고 짙은 밤비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엄마와 주고받는 신호였으니까요. 

‘동굴을 절대로 떠나지 마라.’

소녀는 떨리는 몸을 일으켜 앉았습니다. 추위로 얼어붙은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습니다. 새빨갛게 언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동굴을 돌아보았습니다. 동굴은 여전히 황금빛으로 가득했습니다. 흩뿌린 검은 깃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소녀는 동굴 가장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온몸이 빨갛게 되고 이윽고 파랗게 얼 때까지 소녀는 앉아 있었습니다. 달이 뜨지 않는 대신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여명이 하늘을 물들일 무렵에야 소녀는 간신히 일어섰습니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일어선 채 해가 뜨는 정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붉은 해가 황금빛이 되고 눈이 부실 정도로 하늘을 밝힐 때까지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아침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동굴을 돌아보았습니다.

“동굴 속 황금보다 아침 해 황금빛이 눈이 부시는구나 …”

소녀는 중얼거렸습니다. 동굴에만 파묻혀 있다가 처음으로 보는 일출이었습니다. ‘보게 되어 행복하다.’ 하고 소녀는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햇빛이 들지 못하는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소녀는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내렸습니다. 차갑고 시원한 바람이 소녀를 받아 안았고, 푸른 숲이 쏜살같이 덤벼들었습니다.


이윽고 소녀는 눈을 떴습니다.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두리번거렸습니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왔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볕이 닿지 않는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 난 죽지 않았나?’

소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사각거리며 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소녀는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어깨를 살며시 뻗었습니다.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비비려고 갖다 댔습니다. 그런데 손 대신 깃털이 얼굴을 스쳤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소녀는 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손이 날개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것도 새까만 날개였습니다. 소녀는 깜짝 놀라 입을 만졌습니다. 입술 대신 딱딱하고 뾰족한 부리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자 발톱에 잎사귀가 엉켰습니다. 소녀는 공포에 차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까아아아아악!”

거대한 까마귀의 괴성이 계곡을 울렸습니다.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들은 소녀는 절망에 차서 다시 비명을 질렀습니다. 까마귀 소리에 놀란 작은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습니다. 소녀는 소리를 지르다가 자신이 내는 소리가 너무나도 무서워서 귀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막을 귀도 손도 없었습니다. 대신 까맣고 커다란 날개가 퍼덕였습니다.

소녀는 까마귀가 되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진 청년은 어디선가 울부짖음을 듣고 깨어났습니다.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청년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습니다. 햇볕이 내리쬐는 모양인지 온몸이 따스했습니다. 청년은 대낮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 거대한 까마귀가 날 밀어내서 떨어졌는데.’

조심스레 옴지락거리면서 청년은 일어났습니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밤새 악몽을 꾸고 난 듯이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청년은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해 뜨는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널찍한 평원에 들어섰습니다.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청년은 평원을 지나면 밭이 있고, 밭 옆에 집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떨리는 다리를 짚고 걸었습니다. 햇빛을 받아 지붕이 빛나는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이었습니다.


한편 까마귀가 된 소녀는 동굴로 날아갔습니다. 동굴은 여전히 휘황찬란한 보물로 가득했습니다. 소녀는 날개를 접고 뭉툭한 발톱이 난 두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소녀는 동굴 안에 가만히 앉았습니다.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밤중이 되자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연장을 들고 있는지 쇳조각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윽고 굵은 밧줄 몇 개가 동굴 입구로 치렁치렁 늘어뜨려졌습니다. 그물과 낫과 도끼를 든 마을 사람들이 밧줄을 타고 조심스럽게 동굴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동굴에 혼자 사는 아이가 있다던데 진짜인가?”

“정말이에요. 제가 직접 봤어요. 사나운 까마귀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청년은 동굴에 혼자 사는 소녀를 구하러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습니다.

‘아, 오빠가 왔구나.’

소녀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습니다. 횃불을 든 사람들은 거대한 까마귀의 위용에 깜짝 놀랐습니다. 소녀가 검은 날개를 펼치자 동굴 전체가 어두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까마귀가 있다! 아이를 잡아간 까마귀가 있다!"

청년이 내려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소녀는 생각했습니다. 까마귀가 된 소녀는 날개를 펼치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명 소리와 저주의 말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낫과 도끼날이 날아와 소녀의 몸에 맞았지만 아프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허공에 몸을 던졌습니다.


소녀가 떨어진 계곡은 너무 깊어서 마을 사람들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간혹 계곡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말하길, 가끔 창백한 얼굴에 맨발인 소녀가 풀숲에 숨어 눈만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주변에는 조그만 까마귀 몇 마리가 지키듯이 앉아 있었다고 하고요.(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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