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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Oct 25. 2021

이른바 '중도'라는 것 그리고 <화산도>

첫 번째 장편동화 <승리의 비밀>에 대해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정말 좋은 평들이 많았다. 매우 감사할 따름)를 들었는데, 그중에서 많이 나오는 부분이 3번 후보 유림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림이는 1번 남자, 2번 여자로 갈라쳐진 선거 구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출마했다. 기호 그대로 '제3의 길'을 시도했지만 득표 수도 제일 적고 중간에 후보 단일화 제안도 받는 등 나름 부침이 많다(본인은 잘 모르지만). 평은 제일 좋지만 득표 수는 제일 낮다는 것. 그게 지금 한국 사회에서(정치가 아닌) 중도라는 포지션이 지닌 현실인 것 같다.


따지자면 진보건 보수건 이념 자체가 밟아온 역사도 길거니와 사회문화적으로 논의된 바도 상당하다. 문화예술이론은 마르크시즘의 영향으로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쪽 모두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사회문화적인 논의의 시간을 장구하게 끌고 온 역사가 있기에 현실과 다소 맞지 않는 면이 발생해도(실은 많이 발생해도) 대중을 설득해서 끌고 가는 힘이 축적되어 있다. 이걸 요즘 말로는 '경험치가 많다'고 한다.


정치 이념이든 사상이든 사회문화적으로 축적된 토대 위에서 에센스만 골라 요약하고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추출되는 것인데 사실 한국 사회에서 중도라는 게 사회문화적으로 축적된 경험치도 낮은데다 오랫동안 양쪽에서 멱살 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봉변만 많이 당해온 게 현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도란 건 대체로 이런 처지였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민가로 쳐들어가 눈에다 손전등을 들이대고 협박한다. "너 북이냐 남이냐?" 눈이 부셔서 군인들이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알 수가 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때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저는 무식해서 잘 모르니 선생님이 가르쳐 주십쇼." 여기서 중요한 건 남북 중 옳은 걸 고르는게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생존이 문제인 집단에서 뭔가를 축적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때그때 생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은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 남한 한정으로 말한다면 중도층이란 진보 쪽에 미안함이나 부채감을 느끼는 한편 보수 쪽으로 기울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다. 그 와중에서 나름의 명맥도 끊어져 버렸고.


올해 내가 잘한 일(또는 자랑하고 싶은 일)을 꼽으라면, 재일한인문학가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를 완독했다는 것이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것으로 유명한 <화산도> 1권을 펴면서, 아마도 조정래의 <태백산맥>같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화산도>는 양쪽 사이에 낀 오랫동안 말해지지 못한 중도적 입장에 대한 이야기다. 이른바 중도층이란, 경제사회적 이해관계만 보면 보수 내지 극우와 결합되어 있지만 진보에 대한 부채감은 강하다. 그 부채감이 진보에 대한 은밀한 경제적 지원으로 이어지는데(선거에서는 '표'로 이어지는.) 양쪽에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는다. 보수 쪽에서는 동조자 내지 빨갱이가 아닌가? 라는 의심을 받는 건 물론이고, 진보 쪽에서는 이를테면 빨치산에게 잔뜩 돈을 쥐어주고 난 다음 입당 안 한다고 욕을 먹는 식이다(그럴거면 돈을 받지 말든지). 그래도 주인공은 성질은 불같아도 속은 넓은 사람이라 재산 다 털어서 지원해주고, 친일을 해온 아버지도 속 넓게 이해해준다. (아버지가 친일을 안 했다면 내가 무위도식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 내가 친일을 하지 않고 이름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화산도> 주인공의 속터지는 고구마 행보는 한국 현대사에서 양쪽으로 물어뜯기면서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중도층의 괴로운 위치를 보여준다(그래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재미있게 살면서 할 거 다 한다). 예상된 결말은, 한국에서 중도층이 당분간 관념적으로 소멸되는 상황을 그대로 상징한다. 4.3은 사실상 6.25의 전초전이었고, 중간에 낀 사람들은 현실적 토대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설 곳을 상실한다는 것을. 그러한 상황이 지역적으로 선행된 것이 바로 제주도였다는 얘기다. 작가 김석범이 살아간 시대를 생각하면 중도층 의식이 부채감과 빨갱이 사냥 사이에서 소멸되는 것은 예상된 결말이기는 하다. 


그래도 루쉰이 말한 대로 길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가기 시작하면 그게 길이 된다고 했다. 세상에 없는 존재일지라도 자꾸 생각을 하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중도적 의식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이념적으로 뭔가 설계하기보다는 현실을 토대로 다양한 사회문화적 생각들이 모이는 데서 시작하면 의외로 빠르게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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