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범죄자가 되어 기분이 나쁜 당신에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중이었던 학교가 막 공학으로 바뀌던 때에 첫 여학생으로 입학했다.
항상 맨 앞줄 책상을 차지하는 작은 아이였지만 소극적이고 희생하는 타입의 연약한 여학생은 아니었다.
남자는 실장, 여자는 부실장이라 당연시되었던 반장 선거를 건의하여 새로운 선거 규칙을 만들고,
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항상 실장 자리를 놓친 적 없던 겁 없고 진취적인 여학생이었다.
그런데도 건의 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있었다.
등교부터 하교까지 이어지는 여러 남학생들의 성희롱.
전교생을 얼굴과 몸매 순위로 등수를 매겨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점심시간에는 교육용 컴퓨터로 포르노를 틀어 그 소리를 듣고 부끄러워하는 여학생들을 보며 낄낄 거리기도 했고, 쉬는 시간에는 교실 뒤에서 남학생들끼리 그 영상의 장면들을 흉내내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들을 모든 선생님들도 알고 있었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수치스러움에 학교에 오기도 겁이 난다고, 그런 짓궂은 남학생들에게 따끔한 벌과 훈계가 필요하다고 가장 믿을 만한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큰 용기를 내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 갔지만 이야기하는 동안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께서는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셨고,
'그 아이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춘기 남학생들의 성욕은 어쩔 수가 없어, 너도 사춘기라 더 예민하고 부끄러운 거야'
라며 나의 포기와 이해를 바라셨다.
그 후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등교하던 어느 날,
버스에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추행을 당할 때에도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자주 택시를 타던 내게 학생이 돈도 많다며 핀잔을 줄 때에
아침잠이 많아서라 또다시 침묵했지만 사실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
나는 버스를 타는 모든 남자가 그럴 거라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날 내 바로 귓전에 떠들던 남자들의 웃음소리를 잊지 못해
아직도 사람 많은 버스를 타기가 힘들다.
당신도 폭력이 당연하다 배운 피해자니까
어린 시절의 당신들을 원망하거나 탓하고 싶지 않다.
남자다움이라는 폭력에 갇혀 울고 싶을 때에 울지 못해 서럽고,
힘들 때에도 약한 척 기댈 곳 없어 외로웠을 테니까.
나는 지금 어린아이처럼 떼쓰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약자라 강자인 당신의 보호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냥 이제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옳고 그름을 구별해야 하고,
어떤 일들이 당연하다 여겨지면 안 되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지를 알아야 하고,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사내 새끼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운다'고,
'계집애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 소리를 낸다'고,
욕지거리보다 나쁜 말들을 당연하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고, 긴긴 시간을 외로움에 가두는 폭력을 멈추었으면 한다.
아직도 남자의 성욕은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어 약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위험한 생각은 상처를 만들고, 폭력을 만드는 뿌리임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라도 이렇게 큰 상처가 될지 몰라서 실수한 적이 있다면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고,
그 폭력에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라면 당신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큰 위안이 되었다고 감사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여자와 남자,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진 세상이 아니라,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