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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영혼 Apr 09. 2020

엄마, 파킨슨병 진단받다.

엄마에 대한 단상 2

  정확히 한 달 전이다. 파리에 살고 있는 언니와 나는 한국에 계신 엄마의 상황을 교대로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동생이 키우는 고양이들이 있는데 집을 오랜 기간 비울 때 고양이들 상태 확인을 위해 설치한 카메라가 요긴하게 쓰였다. 시차 덕분에 엄마가 밤에 주무시는 시간을 빼고는 -물론 이 시간도 언니가 대부분 모니터링 하긴 했다- 약 8시간 정도씩 엄마에게 전화로 운동도 권유하고 식사도 확인하고 했다.


   지난해 2월, 하시던 일을 그만두시고 동생과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엄마는 많은 부분에서 동생과 부딪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 둘 그리고 남편과 함께 할 한국 방문 계획으로 들떠 있던 여름,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새벽을 갈랐다. 동생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너머로 엄마의 모습이 이상했다. 말씀도 어눌하시고 거동도 못 하시는 상황이었다. 수면 장애로 10여 년 이상 드시던 수면제를 임의로 복용량보다 더 강하게 드셨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급히 119를 불러 근처 대학병원의 응급실에서 MRI와 CT를 모두 찍었으나 정상으로 나왔고 그 후 엄마는 무기력증을 꾸준히 호소하셨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미국에서 우리 가족이 방문했을 때도 엄마는 기력이 없으셨다. 15년 넘게 앓아 오신 당뇨 때문에 갑자기 살을 빼신다고 작년 초에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시면서 근육이 많이 손실되면서 그러신 건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단순한 노화 과정의 일부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엄마와 지내면서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아오던 동생을 대신해 엄마를 모시고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에도 방문했는데 갑자기 수면제 없이 지내보시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셨다. 전문의도 괜찮겠냐고 반신반의하며 물었는데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의지가 확고하니 전문의도 그래 보자고 했다. 그런데 수면제를 10년 넘게 드시던 엄마가 갑자기 수면제 없이 잘 주무실리 만무했다. 한국에 머무는 내내 엄마는 밤새 뒤척이시다 새벽에 잠드시곤 했고 그나마 잠드시더라도 잠꼬대를 매우 심하게 하셨다.


  그리고 계획된 한국에서의 3주 기간 중, 갑자기 일을 그만두시고 연고지도 없는 서울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시길래 동네 복지회관과 주민센터에서 하는 붓글씨와 노래교실 등을 접수해 드리고 왔었다. 굉장히 활기차게 다니시던 중이셨다. 갑자기 날이 추워지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면서 모든 학원들도 쉬면서 엄마는 집에 계시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다 올해 1월 말에 엄마는 수면제 없이 살아보겠다는 계획을 철회하시고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으셨다. 이번에도 역시 하루 복용치 이상을 임의로 섭취하시고 운동능력, 언어능력 둔화로 응급실에 실려가셨고 MRI, CT 그리고 피검사까지 마쳤으나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응급실 가기 전후 수면제로 인해 몸이 안 좋으실 때 엄마의 걸음걸이는 매우 잰걸음이었다. 문득, 둘째를 봐주러 미국에 오셨던 2018년 10월에 평소와 달리, 잰걸음으로 걷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미국에서도 수면제 없이는 못 주무셨으니 수면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솔직하지 못함도 한 몫했다. 응급실에서 수면제 복용을 묻는 의사의 질문에 아니라고 답했으나 피검사에서 수면제 성분이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3월 중순, 약물로 인한 파킨슨병 가능성을 열어두고 정신건강의학과와  신경과가 함께 협진을 시작했고 3월 25일 신경과에서 PET-CT를 찍기로 했다.


  두 번의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응급실을 다녀올 때마다 엄마의 상태는 급격하게 안 좋아지셨다. 동생은 조그마한 작업실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지니 엄마를 돌 볼 여력이 되지 않았고 또한 많이 지쳐 있었다. 바다 건너 살고 있는 언니와 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선택한 것이 모니터링이었다.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시니 운동이라도 하라고 재촉해야 했다. 그러나 전화로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엄마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나빠졌고 급기야는 침대에서 큰 볼일까지 보는 일이 발생했다. 동생은 이제 본인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둘 중 한 사람이 들어오길 바란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때부터 언니와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결정을 해야 했다. 그때가 3월 중순, 미국도 프랑스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한창 씨끄러워 지던 때였다. 내가 애 둘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갈 것인가, 언니가 한국에 들어갈 것인가.. 결정을 해야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뚫고 말이다. 그때는 언니가 사는 파리와 내가 사는 휴스턴에 STAY-AT-HOME 명령이 떨어지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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