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읽고 나니까 쓰고 싶어져]

by 영랑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 김춘미 옮김

민음사

(1948 발표, 민음사 초판 200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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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처음 다자이 오사무와 인간실격에 대해 들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꽤 여러 번 이들이 언급된 글들을 읽으며 매번 갈팡질팡했다. 이 정도 명성이라면 꼭 한 번 읽고 싶다는 욕망이 일다가도, 불안하고 연약한 젊은 날의 비슷비슷한 자기 서사이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추측에 힘이 빠졌다.

일삼아 책을 읽게 된 요즘이 되어서야 드디어 읽게 되었는데, 요조는 비슷비슷한 청년의 징후를 보이지만, 그 태도에 있어서는 어딘지 특히 화가 나는 점이 있었다. 그게 뭘지, 정리하고 싶고 그러느라 꽤 많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표지에 실레의 자화상이 들어간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실레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점 만으로도 요조나 다자이 오사무와는 확실히 다른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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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는 뭐든 쉽게 얻는 것 같아 보인다.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딱히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성적이 좋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을 뿐 아니라, “존경을 받을 뻔”한 골치 아픈 상황을 타고난 익살로 잘도 벗어난다. 존경받기 싫은 이유는 그것이 왠지 거짓말로 돌아가는 인간 세상에 한 일원이 되는 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애써서라도 “장난꾸러기”로 남고 싶은 것이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요조는 포장된 고립을 택한다. 가면을 쓰고 살기로 하는 거다.


틀림없이 편파적인 게 뻔해. 필경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은 헛일이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참고 그리고 익살꾼 노릇을 계속해 갈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혼밥 혼술 하며 아무도 의지하지 못한 채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드는 고독한 요즘 청년들의 모습과 비슷한 듯하지만, 요조에게는 이렇다 할 결핍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요조가 익살의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그저 세상에 대해 판단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열심히 살만한, 깊이 관계할 가치가 없는 세상과 사람들이라는 스스로의 평가에 따라 그는 자발적으로 고립한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낄낄대는 기만을 반복한다. 상태는 갈수록 심해져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자기기만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무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조에게서 보이는 청년(나이만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꺼려지지만)의 이미지는 보통 이야기하는 이 사회의 미래나 희망도 아니요, 기성체제에 대항하는 위협도 아니다. 그냥 과격한 자기애에 빠진 오만한 한 개인이었다.


인간실격은 ‘청춘의 서’ 또는 ‘젊은 이들의 통과 의례’로 평가되기도 하던데, 이는 ‘청춘’이나 ‘젊은’ 시기를 사는 사람들을 구별해낸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 나에게 요조의 삶은 청년들만이 특히 공감할 것으로 각인되기도 했다. 그동안 책 읽기를 주저했던 이유 중에는 나는 아직 청춘인가? 나는 아직 젊은이인가? 에 대한 미련한 고민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나에게 요조는 의지가 나약하고, 한없이 불안과 불만족에 시달리는, 기만적인 사람이었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도 속이는 습관적 기만에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지만 사실 나는 다르다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과 과잉된 자기애가 읽혔다. “예의 수동적인 봉사정신을 발휘해” 어쩔 수 없이 여성들에게 농담을 던지고, “여자들이 쫓아다닐” 것을 “불명예”로 칭하며 겸양을 떨어대는 것이나, 워낙 남의 일에는 흥미를 못 느낀다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추측하는 모습은 병적인 위선으로 느껴졌다.


요조의 수기를 감싸는 서문과 후기에도 요조(실은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프레임 지우고 싶은지 드러난다. 서문과 후기를 쓰는 ‘나’는 자신의 삶을 요조에 허구적으로 투영하고 한걸음 물러난 다자이 오사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가 “기괴하”고 “괴상하”고 “기묘한” 얼굴, “그저 무턱대고 역겹고 짜증 나고,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싶어”지는 얼굴이라고 말하는 요조에 대한 과장된 묘사는 요조, 즉 자신을 특별하게 위치 짓고 싶은 우회적인 애정 표현으로 보인다. 평범하다는 말을 특이하게 생겼다는 말보다 더 기분 나빠할 과격한 자기애의 전형이 아닐까.

후기에서 마담이 요조를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다고 회상하는 것은 더욱 노골적인데, 언뜻 보면 구제불능의 실패자 같지만, 자신을 겪어본 사람들에게만큼은 아름답게 기억되는 아이 었다는 결론으로 세상의 무지에 대한 조롱과 허세를, 또는 애정에 대한 욕망을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얼마나 역겹던지.


소설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요조와 같은 표정이, 태도가, 능청과 핑계의 말들이 있다는 걸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그게 요조가 아직도 읽히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생각을 떠들고 합리화하는 요조의 말들은 내가 특히 나 자신에게 해왔던 말들이기도 했다. 정말 나약한 것이 아니라 나약하기로 선택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 몹쓸 세상에서 분리되어 나는 좀 더 다른 존재라는 기분을 느끼는 것.

그만큼 이 사회는 더 이상 믿을 만한 것도 존경할 만한 것도, 가치 있는 것도 없어 보이거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더더욱 없는 것 같은 무력함에 희망과 의지를 품기보다는 체념하는 게 적어도 합리적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체념과 해탈은 ‘인지적 속임수’(레카르디 카르멘) 일뿐이다. 아무것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삶을 체념하거나 포기할 수 있다는 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오직 자신의 의지만 남은 풍요의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바꿔 말하면, 나의 의지만 있으면 살아가는 거야 쉽다고 생각하는 극심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만 가능한 건 아닐까.


예전엔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정말 나의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그건 정말 심각한 오해다. 요즘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이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듯, 사는 것도, 살아지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나에게서 비롯되는 상태가 아니다. 요조 본인은 한 번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 주변에 그를 지탱하는 관계들이 그를 그나마 정신병원에라도 보내 그에게 살아볼 기회를 주고 있다. 어쨌거나 가능성을.


누구도 함부로 세상과 삶을 판단하고, 들고 나기를 결정할 수는 없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찰나도 되지 않는다. 내 주변을 채우는 누구 또는 어떤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든 억압하든 고통스럽게 하든 나도 그저 그 주변의 일부일 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계획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글쎄, 그게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공도 실패도 실은 우연이고, 거대한 세상의 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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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을 누가 말할 수 있나. 나는 감히 나에게 실격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무슨 자격으로 ㅎㅎ 나는 심지어 혼자서 태어나지도 못했다. 요즘은 그렇다. 나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는 게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고 또 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조는 별로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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