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나니까 쓰고 싶어 져]
김애란
문학사상
(2013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 초판 2013.01.18)
벌써 몇 해 전에 제주도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읽었다. 소설은 말(言)이 화자가 되어, 더 이상 쓰는 사람이 없어 사라져 가는 말의 마지막 화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당시 남자친구와도, 회사에서도 어쩜 이렇게 말이 안 통할 수가 있을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커지는 외로움에 푹 잠겨있던 나는 이 지구 상에 홀로 남은 마지막 화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기적처럼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자기네 부족 말로 아침인사를 건네주기를, 연민도, 경멸도, 호기심도 없는 얼굴로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놔주기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맛봤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고립과 두려움 안에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소금처럼 하얗게 결정화된 고독... 너무 쓰고 짠 고독.”
그리고 웬일인지 이 소설을 다시 읽었다. 이번엔 ‘중앙’과 ‘소수언어박물관’의 관계가 좀 더 두껍게 눈에 들어온다. ‘소수언어’는 ‘소수의견’으로 읽히기도 한다. 산 채로 박물화되고, 또 상품화되는 소수의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소수는 얼만큼일까. 그건 정말 숫자일까. 그건 정말 말들 그뿐일까. 소설의 화자인 말(言)은 자꾸 ‘나는 누구일까’ 정체성을 묻는다.
“중앙에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 곳곳의 언어를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단지를 세웠다. 결과는 그 반대였다. 그리고 그건 중앙에서 내심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두 기획된 거였는지 몰랐다.”
가장 중요한 기획은 소수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한 명 또는 두 명씩 따로 떨어뜨려놨다는 것이 아닐까. 달리기를 잘했던 화자가 탈출했을 때 고향땅에 단 한 명만 있었어도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치 행동에서 흔히 보이는 ‘우리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새삼 다시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소설의 ‘말(言)’이 여러 언어들 중 ‘소리언어’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 자체가 ‘중앙’이 되어 또 다른 ‘소수언어’를 만들어 배제하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모두의 언어’를 상정하고 또 상상할 수 있다면 “침묵의 미래”는 여전히 시끄러울 것이다.